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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본문
Light & Delight 7월 4일 목회서신
우리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고등학생 때 자주 부르던 중창곡이 있습니다. “평화의 기도”라는 곡입니다. 성 프란시스코가 만든 기도시에 곡을 붙인 것인데, 가사의 내용도 너무 좋고, 곡도 좋아서 함께 노래했던 남성중창팀이, 또는 합창단과 성가대에서 자주 불렀습니다. 노래의 가사인 기도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의혹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이 기도문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함께 전해집니다. 어느 날 저녁 프란시스코의 집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나가 보았더니 한 험상궂은 나병 환자가 서 있었습니다. 그는 몹시 추우니 잠시 방에서 몸을 녹이면 안 되겠느냐고 간청하였습니다. 프란시스코는 그의 손을 잡고 방으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환자는 다시 저녁을 함께 먹도록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식탁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그 환자는 다시 부탁하기를 자기가 너무 추우니 프란시스코에게 알몸으로 자기를 녹여달라고 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입었던 옷을 모두 벗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 나병 환자를 녹여주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프란시스코가 일어나 보니 그 환자는 온 데 간 데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왔다간 흔적조차 없었습니다. 프란시스코는 곧 모든 것을 깨닫고는 자신과 같이 비천한 사람을 찾아와 주셨던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 기도가 바로 유명한 '성 프란시스코의 평화의 기도문’이 된 것입니다.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 나병환자를 맞이하고 안아 주었던 사람, 주님은 그의 마음을 통해 참된 평화가 무엇인지, 평화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평화란 나 혼자 누리는 편안함과는 다릅니다. 평화는 내가 함께 사는 사람들과 아무런 벽이 없이 좋은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손을 내밀어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이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기독교와 교회는 자기가 구원받고 천국에 가는 것을 믿음의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남들은 몰라도 나만 잘되면 복을 받은 것이라고 믿고, 그런 믿음만 추구하고 환영하는 모습만 보입니다. 내가 편안한 삶을 누리는 것이 평화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평안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십자가에서 이루신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평화를 위해 일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라는 말씀과는 아주 동떨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이들은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고 혐오합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함께 식탁으로 부르시고 사랑하셨던 주님의 마음은 그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해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것과,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아무리 죄인이라도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할 일이 아닙니다. 세상이 죄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무너진다고 판단된다면, 더욱 사람들을 사랑하며 품어줄 큰 마음과 사랑이 필요한 것이고, 그렇게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벽을 쌓고 앞장서서 사람을 차별하는 일을 하는 것은 교회가 할 일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별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크신 능력을 세상에 나타내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평화의 도구로 쓰임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고,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할 책임이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을 갈라지게 만드는 모든 벽을 허물고, 서로 손잡게 만드는 일을 위해 헌신해야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에베소서 2: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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