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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터닝포인트(21) - “날 수 계산” 본문
내가 만 20살 때로 기억한다. 대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하나 발견했다. 학생들이 별로 많이 찾지 않을 것 같은, 종교 기독교 섹션에서 “김교신 전집”을 찾았다. 말로만 들었던 분의 책을 만나게 된 것이다. 기쁜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읽을 때마다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글은 “제12,000일의 감(感)”이라는 글이었다.
“12,000일에 1일의 생명을 더 허하시옵거든 단 하루라도 족하오니 제발 생명의 용약이 있게 하옵소서. 과실은 없기를 기대하지 못하오나 생활 원칙, 생명의 본질만은 제발 주 당신의 것으로써 살게 하시옵소서.”(댓글에 김교신의 "제12,000일의 감" 전문이 있습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많이 울었다. 햇빛이 들어오는 도서관 창가에서 누가 볼까 숨어서 훌쩍이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부터 나는 10,000일을 생각하고 계산하며 살기로 했다. 12,000일은 조금 멀게 느껴졌고, 딱 떨어지는 맛은 10,000일이니까. 사람이 태어나서 10,000일을 살려면 27년을 조금 넘게 살아야 한다. 당시에 내 목표대로라면, 나는 10,000일이 되기 전에 결혼도 해야 하고, 일도 시작해야 했다. 내가 태어나서 10,000일이 되는 날은 1995년 2월 24일이었다. 김교신 선생께서 말한 것처럼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사는 것이 날짜 계산을 하라는 의미는 아닐 텐데, 나는 유치한 장난이나 하듯 날짜 계산을 했다. 그런데 나는 당시의 생각과 목표대로 10,000일이 되었을 때는 이미 결혼을 했고, 10,000일에서 며칠 지나면, 교회 사역을 시작할 예정까지 되어 있었으니 목표는 다 이루어져 있는 상태였다.
김교신의 “12,000일의 감”을 소개하고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한 이유는 따로 있다. 나는 1993년 5월 28일 오후 5시 30분, 대학로 ‘학림 다방’에서 아내를 만났다. 그리고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21편을 쓰고 있는 지금, 2020년 10월 13일이 아내를 만난 지 10,000일이 되는 날이다. 사실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라고 하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내를 만난 일일 텐데, 이것을 기록하는 것을 이제까지 미루었다. 이번에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물론 나의 기억과 아내의 기억에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어느 날 사촌 누나가 전화를 했다. “진영아, 너 사귀는 여자 없지? 내가 자매 한 명 소개해 줄까?” 사촌 누나는 서울침례교회 대학부 전도사 사모가 되어 있었다. 인도하던 성경공부에 참여했던 자매가 있는데 괜찮은 사람 같아서 나에게 소개해 주려고 연락을 했다고 하셨다. 당시 나는 만으로 26살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외할머니랑 교회 권사님들이 앞으로 목사가 될 사람이니 좋은 사람을 빨리 만나야 한다고 하면서 자매들을 소개해 주겠다고 자주 연락을 하셨다. 외할머니는 교회에서 유심히 보고 있는 두 명의 자매가 있는데, 모두 사모가 되겠다고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셨다. 나는 “할머니, 내가 목사가 되려고 하는 것도 무섭고 떨리는데, 목사 사모가 되겠다고 기도하는 자매들은 더 무섭네요”라고 하면서 거절했다. 다른 분들에게도 같은 대답을 했다. 나는 목사 사모가 되겠다는 사람은 만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촌 누나에게도 확인을 했다. “혹시 나에게 소개해 주려는 사람이 목사 사모가 될 꿈이 있다고 했나요?” 누나는 “아니. 절대로 목사 사모 안 할 거래.” 그래서 나는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그 날, 시간을 맞추어 학림 다방에 갔다. 마침 부처님 탄신일이라 교회에서 소풍을 갔다. 공원에서 한참 놀다가 집에 와서 옷을 갈아입고, 어머니께 소개팅을 한다고 용돈을 받아서 대학로로 갔다. 연두색 남방과 하얀색 바지. 지금 같으면 아주 꼴 보기 싫은 패션일 텐데, 무슨 용기로 그렇게 입고 갔는지 모르겠다.
참하고 차분하고 예쁘게 생긴 사람이 있었다. 사촌 누나에게 고마웠다. 서로의 이름을 소개하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김소영이에요”라고 했는데, 내 동생이 사귀고 있던 여자와 이름이 똑같았다. 나는 “잘 되면 재밌겠네요”라는 이상한 말을 하면서 대화를 시작했다. 2시간 남짓 이야기를 했는데 이야기가 잘 통했다. 자매는 서울침례교회부터 시작해서 큰 교회들을 다니던 자매였는데, 유명하지도 않은 작은 교회에 다니고 있던 나와 이야기가 잘 통하는 것이 신기했다. 무엇보다 자매는 자기 큰 오빠도 목사고, 형부도 목사여서, 목사가 어떻게 사는지 잘 알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은 절대로 목사 사모는 되지 않을 생각이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목사가 되겠다고 다짐하고 살고 있다고 했는데 왜 그것이 서로에게 거부감이 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만남 후에 나의 왕자병이 도졌다. 이메일도, 삐삐도, 핸드폰도 없던 시절에, 자매의 연락처를 받아 놓던지, 아니면 다음에 만나자고 애프터 신청을 했어야 하는데, 나는 아무 요청도 하지 않고, 자매를 집에 데려다주지도 않고 그냥 보냈다. 지금 그 자매가 나와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고 기적이다.
며칠 후 나의 큰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사촌 누나를 비롯한 우리 집안은 며칠간 정신없이 지냈다. 장례가 모두 마친 후 사촌 누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진영아, 너 소영이 마음에 안 들었니?” “아니요, 마음에 드는데요.” “그런데 왜 애프터 신청도 안 하고 연락처도 주고받지 않았니?” “그걸 내가 말해야 하는 건가요?” 그렇게 대답한 후 나는 누나에게 엄청나게 욕을 먹었다. 성격 좋은 누나인데 그렇게 나를 혼낼 줄은 몰랐다. 전도사 사모가 되어서 성격이 안 좋아졌나 싶기도 했다. 아무튼 나는 누나에게 자매의 연락처를 알아봐 달라고 빌면서 부탁을 했고, 누나는 연락처를 전해 주었다.
자매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데 다시 듣게 된 목소리가 너무 멋있었다. 그리고 종로에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후로 몇 차례 만났다. 놀이공원도 갔다. 처음 만나고 한 달 정도 지날 때, 자매의 큰오빠 집에 나를 초대했다. 초대한 그 날은 자매의 생일이었다. 알지 못했던 나는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다음 만나는 날 놀이공원에서 둘이 찍은 사진을 액자에 넣어 선물했다.
자매는 나를 만나기 전까지 한 번도 연애를 생각도 안 해봤다고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나도 남자 친구가 있으면 어떨까?” 생각했는데, 바로 그 날 내 사촌누나가 연락을 해서 사촌 동생을 소개해 준다고 한 것이다. 누나가 자매에게 “내 사촌 동생이 목사가 될 사람인데, 너는 나중에 사모가 될 거지?”라고 물었을 때, 자신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고 대답했단다. 그랬더니 “너는 아직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다 내려놓지 못했구나”라고 했단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내려놓는 것과 사모가 되는 것은 무슨 상관인가? 아무튼 그 말은 자매에게 도전이 되었던 것 같고, 그래서 나와 만남이 시작된 것이다.
여섯 번째 만나게 되는 날, 나는 자매와 같이 사촌 누나와 큰어머니가 살고 계신 집에 방문했다. 큰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큰어머니도 몸이 좋지 않으셨고, 자매와 같이 누나도 만나면 좋을 것 같아서 같이 갔다. 우리를 보신 큰어머니는 다짜고짜 “몇 번 만났어?”라고 물으셨다. “여섯 번 만났어요”라고 대답하자, “그럼 결혼까지 생각하고 만나는 거지? 어때 결혼할 거야?”라고 물으셨다. 큰어머니는 대장부셨다. 내가 태어날 때 나를 받아주셨던 분이시기도 하다. 나는 그 자리에서는 대답을 얼버무리고 웃으면서 넘어갔다.
그 집에서 나와서 자매와 어느 찻집에 들어가 이야기를 했다. 자매가 나에게 물었다. “나랑 결혼할 생각 있나요? 우리 나이에 결혼을 생각하지 않고 새로운 친구를 만나는 건 의미 없지 않나요? 결혼할 계획이면 계속 만나고, 그렇지 않으면 말죠.” 갑자기 훅 들어온 질문에 나는 “아… 네… 결혼… 하죠…”라고 대답했다. 이 바보 같은 우유부단함의 극치를 달리는 왕자병 환자가 그런 식으로 프러포즈도 아닌 이상한 결혼 결정을 했다. 두고두고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는 일이다.
그날부터 결혼을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서로의 결혼관 배우자관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자매는 배우자 조건 리스트를 꺼내어서 나에게 보여 주었다. 내 기억으로는 자매의 작은 노트에 30가지가 넘게 적혀 있었는데 그중에 12가지만 남겨 놓고 다 줄을 그어서 지운 흔적이 있었다. 그리고 자기가 포기할 수 없는 12가지 조건을 남겨 놓았는데, 나와 맞는 것이 몇 개나 되냐고 물었다. 내가 보니 두 가지는 내가 노력 중이고, 나머지 10가지는 맞는 것 같았다. 그렇게 대답하자 자매는 나에게 어떤 배우자 상을 가지고 있냐고 물었다. 나는 늘 가지고 있던 생각 세 가지를 말했다. 하나님을 나보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 사람들을 보면서 눈물 흘릴 줄 아는 사람, 그리고 나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온 사람이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자매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부모님께 자매를 소개하기 위해 집으로 초대했다. 그런데 동생도 자기 여자 친구를 데리고 오겠다고 했다. 두 명의 김소영이 같은 날 부모님께 소개되었다. 동생은 자기가 다음 해에 결혼을 해야 하니, 나에게 그 해가 넘어가기 전에 결혼하라고 부추겼다. 나도 싫지는 않았지만 너무 급한 일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자매와 의논하면서 그해에 결혼할 준비를 시작했다. 집 근처에 있었던 서빙고 온누리교회에서 결혼식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보았다. 자매가 당시 온누리교회 등록 교인이었기에, 교회에서 결혼식을 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다. 교회 사정에 맞추어서 11월 18일로 정했다. 나는 주일을 교회에서 예배드려야 한다는 고집이 있어서, 날짜를 목요일로 정했다. 만난 지 54일 만에, 그리고 결혼식을 120일 남겨놓고 날짜를 정한 것이다. 날을 정한 후에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바로 그날, 서울에 존 스토트 목사님이 오셔서 강의를 하신다고 해서, 자매와 같이 참석해서 강의를 들었다. 우리는 우리를 축복하는 말씀으로 받았다. “복음 전도와 사회 참여”가 주제였다.
처음 만난 후 174일 만에 결혼을 했다. 특별한 로맨스도 없이, 남들 다 한다는 프러포즈도 없이 결혼해서 지금까지도 미안한 마음이 크다. 남자가 겸손해야 하는데 잘난 맛에 사는 불치 왕자병을 안고 사는 사람이라 아직도 미안하다. 목사 사모는 되지 않겠다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내려놓는다고 결국 목사가 되고야 말 사람과 결혼해서, 지금까지 마음고생 몸고생 하면서 살고 있다. 남편이 빨리 목회 은퇴하기를 바라는 것 같은데,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아직 뭐 그리 할 일이 많이 남았는지 신호를 주지 않으신다. 만나서 10,000일을 살았다. 조금 더 힘내서 20,000일까지는 아프지 말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
22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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