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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터닝포인트(22) - “난 담임목사가 꿈이 아닌데” 본문
2014년 말, 교역자 회의에서 담임목사님이 한 가지 전달 사항을 말씀하셨다. “우리 교회 부목사들의 임기를 6년으로 제한하기로 했습니다.” 나를 비롯한 목사들은 모두 교회가 부목사에게 3년마다 신임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처음에 교회에 갔을 때, 부목사에 대한 규정이 까다로워서 처음 부임 1년 후에 신임투표를 하고(사실 이걸 왜 하는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부임한 지 3년째 되는 해에 신임투표를 하고, 그렇게 3년마다 신임투표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나는 2009년 12월에 부임해서 1년째 되는 2010년에 신임투표를 하기는 했다. 그런데 3년째 되는 해인 2012년에 신임투표는 무슨 일인지 하지 않았고, 2013년에 3년 신임투표를 했다. 2013년에 3년 신임투표를 했으니, 2016년 말까지는 사역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3년마다 신임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니 담임목사님이 부목사 임기를 6년으로 제한한다는 것은 나에게 큰 혼란을 가져왔다. 2013년의 3년 신임투표 결과에 상관없이 부임한 지 6년이 지나면 시무가 종료되는 것이라고 하셨다. 처음부터 있던 규정이 그랬다면 담임목사님이 교역자들에게 따로 전달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뭔가 규정에 대한 적용을 새롭게 한 것이라 추측되었다.
2009년 12월부터 풀타임 사역을 시작했으니, 2015년 11월이 내가 뉴저지에서 사역을 종료하는 때가 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규정의 첫 번째 적용자가 되었다. 졸지에 임기가 1년 남은 부목사가 되었다. 다른 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2014년 여름에 시온이가 대학에 가고, 교회에서 아주 가까운 집으로 이사를 해서 교회도 걸어 다닐 수 있는 기쁨이 있었는데, 2년 계약을 한 집의 계약이 끝나기도 전에 교회를 떠나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2015년, 나이는 만 48세가 되는 해였다. LA를 떠날 때도 나이가 42세여서 부목사로 교회 사역을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었다. 대부분의 교회는 부목사의 나이를 40세 이하를 선호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어떻게 뉴저지에서 부목사로 사역하게 되었었는데, 이제 부목사로서는 더 사역지를 구할 수 없었다. 큰 교회에서 사역했기에 미주에 있는 큰 교회 목사님들을 알고 지냈다. 그래서 목사님들께 연락을 드려 보았다. 대답은 모두 부목사 충원 계획이 없으시다는 것이었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가 분명한데 그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담임목사를 꿈꾸던 사람이 아니다. LA에서 부목사로 사역하시다가 은퇴하시는 목사님을 보고 큰 존경심을 가졌었다. 나도 그렇게 사역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늘 했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가끔 나에게, “너는 언제 담임목사가 되니?” 물으셨다. 꼭 노총각 장가 못 가서 걱정하시는 것처럼 말씀하셨다. 나는 “아들은 목사로 사는 것을 원하지, 담임목사로 사는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말씀드렸다. 나는 담임목사가 되어 취임할 때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보면 이상했다. 담임목사가 되는 것이 저렇게 감격스러운 일인가? 꼭 목사는 누구나 담임목사가 되어야 하나? 지금도 늘 그런 질문을 한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가장 보람 있는 일은, 좋은 리더와 함께 동역하며 좋은 파트너가 되는 것이었다.
2013년 신임투표를 하고 교회에서 3년 사역을 더 하게 되었을 때,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은 이제 담임 목회를 하는 것이 어떨까?”라고 말했다. 아내는 그동안 내가 담임목사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었다. 나도 원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아내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동기를 주셨는지, 처음으로 나에게 담임 목회에 대한 도전을 했다. 그래도 나는 별생각이 없었다. 오랫동안 부목사로 살면서 교회를 섬기고 때가 되면 조용히 은퇴하면 좋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담임 목회지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2015년 초부터 담임목사 청빙이 있는 교회들을 알아보고, 추천을 받으며 청빙에 지원했다. 미국에서 서부와 동부의 대형교회 부목사로 교회 내의 거의 모든 사역을 다 했던 나는, 지원하는 교회마다 관심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결정은 되지 않았다. 탈락했다고 연락을 한 교회도 별로 없다. 심지어 “플랜 B는 필요 없고 다 되었다”라고 말하고 연락이 없다가 담임목사 취임식이 끝난 후에 나에 대한 결과를 말해 준 교회도 있다. 나는 내게 무엇이 부족한지 생각하고, 교회를 지원할 때마다 나의 목회철학과 교회가 지금까지 가져온 방향 등을 맞추어 보면서 지원서를 쓰고 보내는 일을 계속했다. 그리고 내가 최종 결정이 되지 않는 매우 객관적인 원인을 알았다.
내가 지원했던 교회들에서 담임목사가 되는 분들은 셋 중 하나의 조건이 충족된 분들이었다. 첫째, 영어를 아주 잘하는, 둘째,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거나 과정 중에 있는, 셋째, 담임목사 출신, 나는 이 세 가지 조건에 하나도 충족하지 않았다. 이 세 조건은 몇 개월 안에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원서를 낼 때 맨 앞에 나는 이 세 조건이 없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런데 영어를 잘 못 하지만 다음 세대와의 소통을 게을리해본 적이 없고, 박사학위가 없지만 독서와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담임목사 출신은 아니지만, 교회에서 담당한 사역들에 책임감 없이 임한 적은 없다고 했다.
2015년 1월부터 시작된 담임목사 청빙 지원에 대한 일은 1년 내내 계속되었다. 교회의 인터뷰와 지원 과정에서 나는 큰 피로감을 느꼈다. 도대체 교회는 어떤 사람을 담임목사로 원하는 것일까? 큰 교회는 앞에서 말한 세 가지 조건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거절을 당한 것 같고, 작은 교회는 내가 너무 큰 교회에서 사역을 해왔기 때문에 자기들과 맞지 않는다고 했다. 아주 작은 교회들에 전화도 했었다. 자기들에게 부담이 된다고 거절했다. 갈 곳이 없었다.
2015년 가을이 시작되는 무렵 담임목사님이 나보고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가만히 있으면 이대로 사역 종료가 된다고 했다. 나는 목사님께 질문했다. 교회는 늘 각 사람의 은사와 재능에 맞게 사역을 하며 섬길 기회를 준다고 하는데, 그런 일이 왜 목사에게는 적용되지 않는지, 모든 사람이 전부 담임목사가 되어야 하는지. 별다른 대답은 듣지 못했다.
고민을 거듭하다가 처음으로 당회에 아쉬운 말을 전했다. 목회를 시작하면서부터 아버지께서 절대로 교회에 아쉬운 소리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가족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사역 기간 연장을 요청했다. 물론 거절당했다. 그리고 교회는 내게 6개월의 안식월을 주었고, 6년간의 사역이 종료된 후 6개월간 목회 연구라는 이름으로 교회에 적을 두게 해 주었다. 2015년 11월 말에 뉴저지에서의 사역은 종료되었다.
아무 일도 없이 지내는 것이 아주 힘들었다. 늘 바쁘게 일하며 살던 사람이, 아무 일도 없이 하루하루 지내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Uber 택시를 하기로 하고 자격을 얻었다. 처음 승객과 연결이 되었을 때, 나는 갑작스러운 연결에 승객과의 약속 시각에 1분 정도 늦었다. 미국인 승객은 엄청 얼굴이 굳어 있었다. 당황한 나는 승객에게 다니던 길을 묻지도 않고 그냥 목적지로 출발했다. 승객은 자기가 다니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는 나에게 더 불만이 생긴 것 같았다. 비가 오기 시작했고, 길이 막혔다. 도착지에서 승객은 나에게 “나는 너에게 좋은 평점을 줄 수 없다”라고 말했다. 나는 “내가 오늘 처음 Uber를 시작했다. 그래서 익숙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니 양해를 부탁한다”라고 했는데, 그 승객은 나에게 “당신은 나에게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라고 딱 잘라 말하고 갔다. 별 하나를 받았다. 윤동주의 시가 생각나야 했는데 그럴 겨를도 없었다. 집에서 먼 곳이라 다른 승객을 태울까 하는 마음도 있었는데, 너무 무섭고 떨렸다. 그냥 집으로 갔다. 다음날 Uber 회사에서 메시지가 왔다. “처음에는 누구나 잘하기 어렵습니다. 앞으로 잘하면 되니 힘내세요!” Uber가 교회보다 훨씬 좋은 것 같았다.
마음을 추스르고 계속 Uber를 해야 했는데, 연말에 가족들과 한국에 가게 되었다. 한국에 다녀온 후, 갑자기 아버지가 아프시다는 연락을 받고, 나는 다시 한국으로 가서 거의 두 달을 지내게 되었다. Uber는 멀어지고 나는 담임목사 청빙 지원을 계속했다.
아내와 약속한 것이 있었다. 2016년 5월 31일까지, 즉 안식월이 끝나는 날까지 담임목사 청빙 지원을 하고 그때까지 결과가 없으면 목회를 그만하자는 것이었다. 1995년에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했으니 21년이 넘게 목회자로 살았다. 그 정도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목회가 아닌 다른 길에서도 먹고 살 수만 있으면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5월 31일이 되었다. 아침 일찍 교회에 전화했다. “오늘이 제 마지막 날입니다.”
5월 초에 방학이 되어 집에 온 시온이는 우리 가족끼리 주일 예배를 드리자고 했다. 시온이가 없는 동안, 아내와 나는 다른 교회들을 돌아다니면서 주일예배를 드렸었다. 그런데 시온이는 아빠 설교를 듣는 것이 좋으니 우리끼리 예배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나는 내가 설교를 할 테니 헌금은 나에게 하라고 했다. 가족끼리 예배하는 때마다 같이 울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세 식구의 마음이 주님 안에서 견고하다는 것을 확인했고, 주님은 더 깊이 신뢰하고 살도록 은혜를 부어 주시는 것 같았다.
5월 31일 뉴욕에 볼일이 있어서 가족이 같이 나갔다가 어느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런데 시온이가 갑자기 “아빠는 꿈이 뭐야?”라고 물었다. “아빠는 우리 딸이 잘되는 것이 꿈이야”라고 대답했더니, “그건 엄마 꿈이야. 아빠 꿈을 말해봐”라고 다시 물었다. 가만히 생각했다. 내가 지금까지 무슨 꿈을 가지고 살았지? 머릿속에 딱 한 가지 떠오르는 꿈이 있었다. “아빠 꿈은 평생 교회를 섬기는 거야”
그랬다. 중학교 3학년 때 목사가 되기로 작정하고, 마음에 흔들림 없이 지금까지 살았다. 목사는 교회를 섬기는 것이니, 교회를 위해 내 시간과 노력과 모든 것을 다 쏟아부으면, 그렇게 섬길 수 있으면 그것으로 즐거웠다. 교인들 때문에 고민하고 잠을 못 이루고 해도, 그렇게 교회를 섬길 수 있다는 것에 늘 힘이 났고 감사했다. 그런데 지금 그 일이 계속될 수 있을지, 멈추어야 할지 기로에 놓여 있었다.
6월 1일 아침에 새로운 담임목사 청빙 광고를 보았다. ‘에임스반석교회’ 아이오와주에 있는 교회란다. 아이오와주는 어디지? 유학생 청년들을 섬기는 교회란다. 그리고 사역에 필요한 주요 언어는 한국어란다. 미국에 있는 이민 교회가, 유학생을 섬기는 교회가 주요 언어가 한국어라는 것이 신기했다. 그리고 아내에게 “나 한 번만 더 지원해 볼까? 청년들을 섬기는 교회이고 주요 언어는 한국어라는데?. 아이오와는 미국 중부에 있는 것 같아.”
23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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