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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터닝포인트(19) - 정치적이라고요? 본문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19) - 정치적이라고요?

Happy Jin 2020. 10. 1.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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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1년 부교역자 생활을 했다. 사역을 시작했던 교회에서 부목사들이 담임목사님 앞에서 다투는 광경을 보았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엇을 더 많이 가지려고 무엇을 놓치지 않으려고 그러는 것일까? 그렇게 얻고 지켜봐야 부목사인데, 왜 저렇게 욕심을 부릴까? 물론 자신들에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지 모르고, 심지어는 정의를 위해 다투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욕심과 사람에 대한 시기가 이미 다 비치는데, 강단에 서서 설교하면 사람들은 자신을 거룩한 사람으로 볼 것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자신에게 좋은 말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편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싸우는 목사들을 보고 담임목사님은 많이 힘이 드셨는지, 일개(?) 전도사인 나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어보시기까지 했다. 담임목사로서 교인들 상대하며 목회하는 것도 버거우실 텐데, 부목사들 목회까지 하셔야 하는 상황을 보면서 마음이 무거웠다.

 

미국에 와서 사역하면서 교회에서 이상한 모습을 보았다. 부목사들 중 몇 사람이, 담임목사님을 무시하는 건지 아니면 반감이 있는 건지, 아무튼 그런 목사들이 있었다. 자신들이 교회에 먼저 와 있었더라도 담임목사로 부임하신 분에 대해서는 먼저 인정하고 함께 마음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혹시 마음이 맞지 않거나 자신들의 기대가 채워지지 않으면, 담임목사님과 소통하고 마음을 맞추어 보는 것이 먼저 해야 할 일 아닌가? 혹시 그것이 잘 안 되면, 길을 찾아 나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함께 좋은 팀워크를 이뤄도 목회가 쉽지 않은데 왜 담임목사와 마음을 같이 하려고 하지 않을까? 자신이 가진 불만이나 담임목사와 뜻이 맞지 않은 부분이 있으면, 서로 솔직하게 터놓고 소통하면서 뜻을 모으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데 아무도 그런 노력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뒤에서 계속 험담을 한다. 담임목사가 너무 권위를 높이고 벽이 너무 높다는 핑계만 댄다. 그런 부목사들과 사역을 해야 하는 담임목사는 얼마나 갑갑할까? 물론 담임목사들도 책임은 있다. 부목사들과 소통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자신이 대장인 것처럼 사람을 부려먹기나 하는 담임목사도 있다. 담임목사가 먼저 부목사들에게 마음을 열지 않으면 결코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없다. 그리고 목회자라면 소통부터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닐까?

 

부목사 중에는 좋은 보직을 맡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도 있다. 좋은 보직이라는 것은, 대부분 장년 교구 사역 또는 선임이나 행정 목사가 되는 것이다. 솔직히 학생 사역이나 청년 사역을 하면 생기는 것이 없다. 오히려 자신의 수입보다 더 많은 것을 써야 하는 경우도 있다. 좋은 자리에 있으면 월급 외에 더 들어오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른 보직보다 교구 사역을 더 좋아하고, 자신이 맡은 교구가 부유층이 사는 지역이길 바란다. 그 자리에 가려고 수를 쓰거나 줄을 서는 인간들도 있다. 

 

교회에서 급을 나누어서 사역자들을 차별하는 목사들도 있다. 신학교 선배, 목사 안수 선배, 거기까지는 이해를 한다고 하더라도, 풀타임, 파트타임으로 사람의 급을 정하는 인간도 있었다. 여성 사역자들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반말하는 자들도 있고, 사무실 행정 직원을 자기 종인 것처럼 부리는 자들도 있다. 자신의 기득권을 찾고 유지하려고 애쓰는 목사들이 있는가 하면, 큰 교회에서 편안하게 놀면서 누릴 것만 찾아다니는 목사들도 있다. 나는 그래서 가끔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직업은 대형교회 부목사다.”

 

앞에서 말한 그런 부목사들은 편 가르기를 좋아한다. 만만해 보이는 교역자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고, 함께 사역하는 교인들도 자기편으로 만든다. 그래서 세력을 형성하고 교회 안에서 자기들 나름의 정치를 한다. 나는 그런 식으로 교회 안에서 정치하려는 인간들을 극도로 싫어한다. 정치는 힘을 나누어 주는 것이라고 정의되어야 하는데, 정치를 힘을 모으는 것이라고 잘못 배운 것 같다. 

 

뉴저지에서 어쩌다 선임 부목사가 되었을 때, 나는 부교역자들이 자기 세력을 형성하려는 것을 막아보려고 했다. 담임목사님께도 내 생각을 말씀드렸다. 담임목사님이 목회에 더 집중하고 힘을 쏟을 수 있기를 바랐다. 부목사들 때문에 속이 상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데도 부목사들은 자신이 조금 더 힘을 가지려고 애쓰는 모습들을 보였고, 결국 서로 갈등을 빚기도 했다. 목사가 되기 전에 좋은 사람이 될 수는 없을까? 선한 마음과 의도로 사람들을 대하고 온전히 섬길 수는 없을까? 선임의 자리에 있으면서 늘 고민했던 것은 그것이었다. 뉴저지에서 담임목사님은 내가 정치적이지 않고 정치를 싫어한다는 것을 좋아하셨던 것 같다. 교회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 외부에서 오시는 목사님들께 나를 소개해야 하는 경우에는, 이진영 목사는 가장 이상적인 선임 부목사라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담임목사님이 나를 부르셔서 “이 목사님은 정치를 싫어한다고 하더니, 요즘 보니 상당히 정치를 좋아하네요?”라고 하셨다. 갑자기 그런 말을 듣고 멍해졌다. “제가 정치를 좋아한다고요? 왜, 누가 그러던가요?”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왜 세월호 사건에 대한 언급을 자주 하나요?”라고 답을 하신다.

 

2014년 4월 16일에 세월호 참사가 있었다. 새벽기도회 전에 뉴스를 보고 너무 황망했다. 당일 새벽기도회 인도를 하면서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4월 20일은 부활절이었다. 한국에서 있었던 참담한 소식은 뒤로하고, 교회는 멋지게 부활절 행사를 치렀다. 부활의 기쁨을 찬양하며 감사하는 가운데, 참사를 겪은 사람들에 대해 공감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린 학생들이 그렇게 많이 희생되었는데도, 그 장면을 방송으로 눈으로 보았으면서도 아무도 마음 아파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 교회를 바라보며 갑갑했다. 부활의 소식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마음이 무거워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의 상황들을 보며 화가 났다. 아무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분노까지 생겼다.

 

며칠이 지나서 4월 27일 주일이 되었다. 담임목사님께서 출타하셔서 나는 주일예배 설교를 하게 되었다. 설교 말미에 나는 세월호 참사를 겪은 희생자들과 유족들의 아픔을 담아낼 수 있는 교회가 부활의 능력이 있는 교회가 아니겠냐고 했다. 그리고 나는 교회에서 좌파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내가 페이스북에 지도자들의 잘못에 대해 비판하고, 교회에서 세월호 사건에 대해 언급(사실 언급이라기보다는 노란 리본과 팔찌를 하고 다니는 것, 같은 마음을 가진 분들과 가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전부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을 한다고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 소리를 들으신 담임목사님이 나에게 하신 말씀이 정치를 좋아하냐고 물으신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나에게 교회에 대한 관점과 세상을 보는 관점을 상당히 변화시킨 사건이었다. 나는 교회에 대해 다시 질문하기 시작했다. 교회는 왜 세상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왜 세상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것일까? 세상에서 큰일을 하기 바라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대체 기독교와 성경의 가치는 어디에서 적용해야 할까? 사회의 불의에 대해 조금의 저항도 반응도 하지 않는 교회는 왜 세상에 서 있어야 하는 것일까? 고통받는 세상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기득권을 가진 자들에게 붙으려고 하는 것이 진짜 교회의 본질인가? 교회는 왜 리더십을 강조하게 되었을까? 세상을 이끄는 사람, 세상에서 힘을 가진 사람들을 만드는 것이 교회의 목표인가? 교회에서는 항상 성경을 공부를 강조하는데, 성경의 본래 의미를 알아야 한다고 하면서 설교하고 가르치는데, 항상 성경 공부는 1세기로만 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심지어 1세기에 멈추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 본래의 의미를 깨달으면 현실은 그냥 살 수 있는 것일까? 거의 6년 내내 현실에 대해서는 언급도 없고 관심도 없었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성경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은 1세기까지만 살아계셨고, 21세기에는 안 계시는가? 하나님은 훌륭한 건물을 가진 교회 안에만 계시는 분인가?

 

앞의 글에서 소개한 제자훈련에서 교제했던 김동석 집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중요한 사실을 배웠다. 교회는 뛰어난 정치인을 만드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시민 의식을 가진 교인들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기독교인이고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사회가 하나님 나라의 가치인 정의와 사랑과 평화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다.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시민들이 만들어져야 하고, 그들이 세상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정치 참여이다. 그 일을 교회가 정치적이라고 마다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교회는 명문대 출신, 좋은 직업을 가진 소위 성공한 사람들을 만들려는 꿈을 내려놓아야 한다. 자신의 자리에서 선하고 정의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 것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

 

어느 날 교회에서 장로님 한 분과 같이 있다가, 졸업을 앞둔 고등학생들을 만났다. 장로님께서 그 학생 중 한 명을 알고 계셨고, 장로님은 그 학생에게 “너는 이번에 어느 대학으로 가게 되었니?”라고 물으셨다. “C 대학에 가게 되었어요”라고 학생이 대답하자, 장로님은 잘했다고 칭찬하며 기뻐하셨다. C 대학은 아이비리그 대학이다. 그리고 옆의 학생에게도 물으셨다. 옆에 있던 학생이 “저는 R 대학에 가게 되었어요”라고 대답했다. R 대학은 주립대학이다. 상당히 좋은 학교다. 그런데 장로님은 “너도 나중에 C 대학으로 편입하면 돼”라고 하신다. 옆에 서 있던 나는 충격을 받았고 학생 보기가 너무나 민망했다. 교회가 사람을 차별하는 일에 앞장을 선다. 학생들 앞에서 그들의 노력에 대해 박수는 하지 못할망정 대학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결국 이러려고 성경을 공부한 것이고 교회의 리더십이 된 것이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 성경을 공부하고 교회에 다니면서 기도하는 신앙생활을 해 온 것이다.

 

세상과 아무런 교통도 하지 못하는 교회, 세상에 대해서 정의와 사랑과 평화를 외치려고 하면 정치적이라고 몰아붙이는 교회, 부와 힘을 가진 사람들에게 기울어지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교회, 자신이 가진 기득권이 무너질까 불안해 하면서, 힘을 써야 하는 곳에는 아무런 힘도 사용하지 않는 교회, 그런 교회가 과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가르칠 수 있을까? 그런 교회에서 외치는 하나님 나라는 과연 어떤 나라일까?

 

20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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