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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터닝포인트(14) - 이게 쉬는 건가요? 본문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14) - 이게 쉬는 건가요?

Happy Jin 2020. 9. 5.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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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에서 뉴저지로 이주를 결정하고 이삿짐을 꾸릴 때, 미국 생활 6년 반 만에 우리 가족의 짐은 2배가 되었다. 이삿짐센터를 알아보니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견적을 내러 오는 사람들이 차라리 한국으로 가는 것이 비용이 덜 든다고, 대륙횡단은 돈이 많이 든다고 했다. 타던 차 중 하나를 팔아서 이사 비용을 마련했다. 그리고 나는 혼자서 차를 타고 대륙횡단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주변의 만류가 심했다. 혼자서는 위험하다고. 겁이 많은 나는 대륙횡단을 포기하고, 차도 보냈다. 지금까지 인생에서 별로 후회하는 일이 없는데, 대륙횡단 포기는 아직도 이불킥의 원인이다. 뉴저지에서 아이오와까지 몇 차례 왕복했고, 아이오와에서 캐나다를 거쳐서 옐로우스톤을 다녀오는 로드트립을 했기에, 대륙횡단 거리보다 훨씬 많은 운전을 했지만, 혼자서 대륙을 가로지르는 여행을 하지 못한 것은 너무 아쉽다. 나중에 뉴저지에서 LA까지 혼자 운전해서 이주하는 자매를 보고, 김진수 장로님께서 몇 차례 대륙 횡단을 하시는 것을 보면서, 더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언제 그럴 기회가 있으려나?

 

뉴저지로 출발하기 전날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이진영 목사님인가요? 뉴저지에 도착했나요?” 자기소개도 하지 않고 뉴저지에 왔냐고 묻는 전화, 나는 우선 질문에 답했다. “내일 가는데요” 그랬더니 “그럼 뉴저지 도착하면 연락해요. 한 번 만나요.” 그러신다. “누구신데요?” 그제야 “뉴저지초대교회 한규삼 목사예요”. 강준민 목사님께서 소개해 주신다는 분이 그분이셨다. 

 

LA에서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뉴욕에 아침 일찍 도착했다. 한 달 전에 가족과 와서 렌트 계약을 한 집으로 찾아가서 열쇠를 받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짐에는 침낭이 하나 있었다. 우선 누워 잘 수 있는 준비는 되었다. 다음 날 이삿짐과 차가 오기로 했으니, 하루만 잘 견디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테너플라이에 위치한 집 가까운 곳에 중국음식점이 있었다. 그것도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반가운 마음으로 점심을 먹으러 가서 당당하게 짜장면을 시켰다. 그리고 저녁에 먹을 볶음밥을 포장 주문을 했다. 그런데 짜장면을 먹다가 화가 났고 슬퍼졌다. 너무 맛이 없었다. 그렇게 맛없는 짜장면은 평생 처음 먹어보는 것 같았다. “아! 이 동네에서 어떻게 살지? 다른 식당도 그럴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LA가 단 몇 시간 만에 그리워졌다. LA에서는 어디가 더 맛있는 곳인지 비교하면서 음식을 사 먹었는데, 여긴 먹을 만한 곳을 찾아야 하는 곳인가? 저녁이 되었을 때, 볶음밥은 다음 날 아침을 위해 보관해 놓고, 저녁을 먹으러 다시 그 식당에 갔다. “설마 짬뽕까지 그러진 않겠지. 짬뽕은 실패하지 않겠지” 그런데 짬뽕을 먹으면서 눈물이 났다. “아! 여긴 안 되겠구나!” 이렇게 가까운 곳에 중국음식점이 있는데, 여기가 이런 곳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장사를 한 집인지는 모르지만, 결국 얼마 되지 않아 그 식당은 다른 식당으로 바뀌었다.

 

집을 청소해야 하는데 청소도구가 이삿짐에 있으니 새로 살 수도 없고, 가까운 마트에 가서 페이퍼 타월을 사서 우선 내가 누워 자야 할 영역을 닦았다. 그런데 너무 더러웠다.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살펴보니 부엌의 카운터 탑이 넓고 컸다. 침낭을 카운터 탑 위에 펴고 올라갔다. “떨어지면 죽는다. 제발 움직이지 말고 자자”고 다짐하고, 그렇게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이삿짐과 차가 오기로 한 날이다. 아침에 동네 산책을 했다. 길에서 마주 오던 한 사람에게 “Hi!”하고 웃으면서 유창하게 인사를 전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나를 아래위로 한 번 훑어보고 째려보며 지나갔다. 충격이었다. 미국에서 인사를 안 받아 주는 사람은 6년 반 만에 처음 봤다. 이 동네에 살 수 있을까? 짜장면과 짬뽕도 맛이 없고, 사람도 친절하지 않은 곳이 과연 살만한 곳일까? 

 

그런데 그런 생각을 모두 지워버리는 사건이 생겼다. 이삿짐이 저녁이 되도록 도착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아무 연락이 없었다. “그래. 하루 이틀 정도는 지연될 수도 있지.” 그런데 문제는 어떤 연락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삿짐 회사에 전화했다. 받지 않는다. 몇 번 전화하고 겨우 연결이 되었고, 자기들도 연락을 받은 것이 없다고 알아보겠다고 한다. 그런데 그날 연락이 오지 않았다. 며칠 지나서야 연락이 왔다. 애틀란타에서 트럭이 고장이어서 멈춰있다고 한다. 차도 사정이 생겨서 예정된 날짜보다 일주일 늦는단다. 문제는 내가 며칠 동안 생활할 수 있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침낭 하나 외에는, 수건도 없었다. 도착한 다음 날 머리도 못 감고 세수만 했는데, 며칠 동안 어떻게 지내야 하나 막막했다. 마트에 가봐도 타올을 팔지 않는다. 타올을 사려면 차를 타고 가야 하는데 차도 없고 버스는 어떻게 타야 하는지 모르겠고, 택시를 부르려니 너무 비싸고, 결국 면 티셔츠 중 하나를 수건 대용으로 쓰기로 했다. 

 

이삿짐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트럭을 고쳐서 오겠단다. 나는 교체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는데,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럼 나에게 어떻게 보상을 할 거냐고 따졌다. 당장 내가 이삿짐이 도착할 때까지 호텔로 들어가야 하겠다고 했다. 가까이 있는 호텔은 하루 100불이 넘었다. 그제야 마음이 급해졌는지 자주 연락을 하면서 어떻게든 빨리 보내주겠다고 한다. 하지만 분명히 손해배상은 요청해야 했다. 예정된 날짜보다 15일이 지나서야 이삿짐은 도착했다. 다행인지 몰라도 차는 예정보다 일주일 늦게 도착했다. 

 

뉴저지에서 처음 주일을 맞이했을 때, 차가 없어서 6.5마일 정도 떨어진 뉴저지초대교회라는 곳에는 갈 수 없었다. 가까운 교회를 검색해보니 3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한인교회가 있다고 해서, 걸어서 교회에 갔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갑자기 먹구름이 하늘을 가리더니 어마어마한 소나기가 쏟아졌다. 아무 방비도 없이 비에 완전히 젖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집에서 3분 정도 거리에 한인교회가 있었다. 인터넷 검색에 나오지 않는 교회였다. 뉴저지에서의 처음 생활이 서러웠다. 혼자였고, 아는 사람도 없었고, 인사도 받아주지 않고, 빈집에서, 마땅한 식당도 찾지 못하고,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과연 이 동네에서 내가 살 수 있을까 싶었다.

 

차가 도착했을 때 차를 타고 처음 간 곳이 뉴저지초대교회였다. 마침 교회에서는 시카고 윌로우크릭 교회의 리더십 서밋이 중계되고 있었고, 많은 사람이 참석 중이었다. 예상외로(?) 친절한 안내를 받고 담임목사님을 만날 수 있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에 담임목사님은 나에게 “찬양팀을 구성하고 찬양 예배를 인도해 줄 수 있어요?”라고 물었다. 내 전문 분야라 할 수 있다고 하자, 다음 주 수요일 저녁 예배 후에 정식 인터뷰를 하면 좋겠다고 했고, 그렇게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모든 당회원이 다 모였고, 한 시간 반이 넘는 인터뷰를 했다. 나는 교회에서 상당히 중요한 사역을 위한 인터뷰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연락을 받았다. 교회에서 주일 오후에 찬양 예배를 시작했는데, 마땅한 인도자가 없고, 찬양팀도 구성은 되어 있지만, 체계가 잘 자리잡혀 있지 않아서, 찬양 예배 인도를 담당해 달라고 했다. 단지 그 사역만 담당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례비(월급)는 1,200불을 주신단다. 집 렌트비가 2,500불인데, 한 달에 1,200불, 이 일을 시작하는 것이 맞을까?

 

사실 아내는 뉴저지로 오면서 뉴저지에 대해 알아보던 중에, 내가 뉴저지초대교회에서 사역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아내는 항상 주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한 사람이다. 보통 부부들은 큰 결정을 남편이 하는 것 같은데, 우리 부부는 지난 시간 동안 큰 결정은 아내에게 주시는 주님의 인도하심이 더 뚜렷했었다. 교회에서 통보를 받고 한국에 있는 아내와 통화를 했다. 1,200불을 준다는데, 일을 시작할까? 아내는 하지 말라고 했다. 어떤 면에서 월급은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인데, 당신이 1,200불 받을 사람이냐고 그랬다. 그래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보다 그렇게 시작해 보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아내에게 1,200불을 받으면 우리가 언제까지 생활할 수 있냐고 물었다. 아내는 11월까지(그때가 8월 초였다)는 생활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11월까지만 그렇게 일을 해보기로 했다. 교회에 연락해서 9월부터 일을 시작하겠다고 했다. 왜 당장 시작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내가 하나님께 4개월만 아무 일도 없이 쉬겠다고 했고, 8월말까지 쉬어야 딱 4개월 쉬는 것이니, 9월부터 시작할 수 있겠다고 했다. 그리고 교회는 그때부터 계속 예배에 참여하면서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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