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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터닝포인트(16) - 뜻밖의 변화 본문
뉴저지초대교회에서 full-time 사역을 시작하고 1년 정도 지나는 시점에, 나보다 먼저 초대교회에서 사역하던 목회자들이 모두 교회를 떠났다. 졸지에 나는 부교역자들 중 선임이 되었다. ‘졸지에’라는 말을 어디에 쓰는지 잘 몰랐는데, 당시 내 입장에 딱 어울리는 말이었다. part-time으로 사역한 기간을 합해도 1년이 약간 넘을 텐데, 교회의 사정도 다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선임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 부담될 수밖에 없었다.
새롭게 부교역자를 EM과 교육부 사역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청빙해야 했다. 문제는 부교역자들이 없는 상황에서 교회 내의 거의 모든 업무를 책임과 지휘까지는 아니더라도(?) 관찰하고 지켜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특별히 담임목사님께서 개인적인 사정으로 새벽기도회를 책임지고 인도하실만한 여건이 되지 않아서 토요일 새벽기도회만 인도하셨다. 평일에는 부목사들이 요일마다 담당해서 인도하고 있었는데, 그 일을 혼자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새벽기도를 하는 것이 오랫동안 훈련이 되어 있었고, 매일 말씀묵상도 하고 있었기에 나 혼자 매일 인도하는 것도 괜찮았지만, 그래도 그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평일에 몇 번은 EM 사역자들이 새벽기도 인도를 담당하기로 했다. EM 사역자들이 새벽기도 인도를 하는 일은 이민 교회에서 흔히 있는 일은 아니다. 그래서 재밌는 에피소드가 많았다. 한국어로 설교를 해보지 않은 EM 사역자들이 우리말로 설교를 하려고 구글 번역기를 사용해서 한글로 원고를 써오기도 했다. 보통 새벽기도회 설교가 보통 10~15분 정도였는데, EM 사역자들의 설교는 5분도 되지 않아 끝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의 모든 사역에 부목사들이 채워졌다. 부목사 중에서는 내가 나이가 가장 위였고, 신학교 졸업, 목사 안수 등도 선배의 위치였다. 교회는 당시까지는 선임 목사라는 정식 타이틀이 없었다. 좋게 생각하면 부교역자 중 한 사람에게 무게 중심이 생기는 것을 조심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데 어느 날 당회에서 나에게 ‘대표 부목사’라는 타이틀을 정해 주었다. 왜 그런 타이틀을 정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부목사들을 대표하는 일만 하고, 선임으로 다른 부목사들을 통제하는 일은 하지 말라는 의도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나도 교회 내에서 부목사들이 세력을 만들고 정치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기에, 독특한 타이틀을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장로님들 중 한 분은 웃으면서 나에게 “이 대표”라고 부르시기도 했다. “여기가 교회인가? 회사인가?” 그 타이틀은 1년 만에 ‘선임 부목사’로 바뀌었다.
나는 부교역자들에게 권면했다. 특별히 EM과 교육부 사역자들에게 당부했다. 교회 목회자들이니 사역의 특성상 근무 시간을 정하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지만, 아침에 경건의 시간은 함께 하자고 했다. 그리고 서로 어떤 사역을 하고 있는지, 사역에서 소통하며 서로 도울 일은 없는지 챙기자고 했다. 감사하게도 모든 교역자들이 잘 따라주었다. 내가 처음 접한 이민교회의 EM 사역자들은(모두 그런 것은 아닐 것이라고 믿지만), 교회에서 자기가 맡은 사역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KM 사역에는 관심도 없고, 언제 출근을 하는지 퇴근을 하는지도 몰랐다. 전체 교역자 회의가 있으면 얼굴은 비추지만, 회의가 마치면 일주일 동안 얼굴 한번 보기 어려운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뉴저지초대교회에서 함께 사역한 EM 사역자들은, 그래도 일주일에 몇 번은 새벽기도회에도 참여했고, 아침 경건의 시간도 같이 했고, 족구도 함께 하면서 좋은 팀워크를 만들었다. 족구를 좋아하는 담임목사님께서 모든 교역자가 일주일에 한 번은 족구를 해야 한다고 해서, 화요일 회의가 마치면 체육관에서 족구 리그를 했다. 족구를 처음 하는 사람도 몇 년이 지나는 사이 실력이 나아졌다. 목회 실력은 모르겠지만, 족구 실력은 모두 향상되었다.
사역의 양이 많아지면서 담임목사님은 나에게 예배 사역과 그와 관련된 사역, 그리고 행정의 일만 담당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으셨다. 공동체 관련 사역을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겠느냐는 말씀이었다. 하지만 나는 목회자가 공동체(교구) 사역을 하지 않고, 성도들을 만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목회적 감각을 잃는 것이라고 말씀드렸고, 적은 수의 교구라도 계속해서 공동체 사역을 하기로 했다.
교회에는 오래전부터 제자훈련이 있었다. 그런데 바로 전에 계시다가 한국으로 가신 목사님께서 계시는 동안 제자훈련이 중단되었다. 내가 교회에 처음 들어갔을 때 제자훈련이라는 이름으로 공부하는 클래스가 있기는 했지만 교회 리더십을 양성할 수 있는 수준이 되지는 못했다. 간단히 교리와 성경을 공부하는 클래스가 아니었나 싶었다. 담임목사님은 교회 리더십의 양성을 위해 정식으로 제자훈련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으셨고, 당시 유일하게 제자훈련 사역의 경험자인 나는 좋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몇 년 만에 제자훈련이 시작되었다. 담당할 사역자가 없었기에 내가 인도하는 한 반만 개설된 제자훈련에는 생각보다 많은 분이 참석했다. 가만히 살펴보니 그동안 교회의 직분자가 되어야 하는데 마땅한 조건을 채우지 못한 분들이 대거 참여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니 좋은 분위기가 잡히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두세 명의 젊은 분들이 있었다. 첫 시간에 자신의 간증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가장 나이가 어린 사람이 시작하자고 했고, 자매 한 분이 간증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간증이 제자훈련 전체의 분위기를 끝까지 유지할만한 에너지를 갖게 했다. 시답지 않은 농담으로 대충 넘어가려는 틈새가, 자매의 간증과 제자훈련에 임하게 된 동기를 듣는 순간 모두 채워졌다. “Right Timing, Right Person”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적절한 사람을 나타나게 하시는 주님의 손길은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제자훈련은 계속되면서 지원자들이 많아졌고, 부목사들이 제자훈련 세미나에 다녀오면서 함께 사역자로 참여해서 여러 반이 운영되었다. 그런 가운데 나는 남자들만 제자훈련을 하는 반을 맡았다. LA에서 사역할 때 시작했던 ‘남성 큐티 모임’이 너무 좋았고, 남자들의 변화와 성숙에 더 관심이 많았기에, 남자들의 제자훈련반을 담당하고자 했고, 뉴저지 사역을 마칠 때까지 계속했다.
잠시 LA에서 했던 “남성 큐티 모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다. 동양선교교회에서는 큐티 사역이 활발하게 진행 중이었다. 담임목사님도 큐티에서는 대가이셨고, 큐티 사역을 담당하시는 전도사님도 계셨고, 권사님도 계셨다. 그런데 모두 여성들만 참여하고 있었다. 어느 날 새가족 훈련을 마치신 남자분이 나를 찾아오셨다. 나에게 큐티를 가르쳐 달라고 하셨다. 교회에 큐티 반이 있으니 찾아가 보시면 어떻겠냐고 권했더니, 이미 가봤는데 모두 여자들만 있어서 계속 참여하기가 어렵다고 하셨다. 그리고 정말 큐티를 배우고 싶으니 가르쳐 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하셨다. 그래서 날을 잡고 그분을 만나서 일대일로 큐티를 가르쳐 드렸다. 첫 만남을 마치고 그분은 “이렇게 좋은 것을 혼자서 공부하기는 너무 아깝다”고 하시면서, 자신이 신앙생활을 해왔던 모든 것의 결정체가 큐티에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다음 주에 두 분을 더 데리고 오셨다. 혼자서는 도저히 아까워서 안 되겠다고 하시면서. 그렇게 남성 큐티 모임이 시작되었다. 많은 분이 남성 큐티 모임에 오셨다. 한 학기만 큐티를 배우고 가시는 분들도 많았지만, 계속 훈련에 참여하시면서 말씀 묵상을 나누는 분들도 있었다.
어느 날 한 분이 오셨다. 낯이 익은 분이었다. 그분은 그동안 한국에서 직장에 다니셨고, 아내와 아들들과 부모님이 LA에 계셨었다. 그러다 그분의 아버님께서 돌아가셨고, 임종과 장례 절차를 내가 섬기게 되었는데, 그때 만났던 분이다. 그분은 미국으로 완전히 이주하셨고 교회에 등록하고 출석하시면서 큐티 모임까지 오시게 된 것이다. 어떻게 큐티 모임에 오실 마음이 생겼는지 여쭈었더니, 그분의 아내가, 이진영 목사님이 아버님 장례식을 잘 섬겨 주셨는데, 목사님께 은혜를 갚으려면 목사님이 인도하시는 큐티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하면서 참석을 권했다고 대답하셨다. 의외의 대답에 많이 웃었다. 그런데 자신은 한 번도 교회에서 무엇을 배운 것이 없으니, 숙제가 있어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큰 기대는 하지 말라고 하셨다. 정말 그다음 주에 큐티를 나누는 시간에, 일주일 동안 큐티를 기록한 노트를 보니 달랑 한 줄만 있었다. 그 정도면 오기 싫다는 표현인 줄 알았는데, 그분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셨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큐티 노트는 한 줄에서 한 문단, 한 문단에서 한 페이지, 한 페이지에서 두세 페이지까지 늘어났다. 그리고 매일(매주가 아니고 매일) 2~3페이지의 큐티 노트를 기록해서 오셨다.
남성 큐티 모임을 시작한 후 1~2년 동안은 거의 나 혼자 떠드는 것 같았다. 하나님의 말씀과 나의 삶이 만나고, 그 안에서 때로는 갈등도 경험하고 변화도 경험하는 과정을 나누는 것이 큐티 나눔의 맛이고 큰 은혜인데, 그렇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남자들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동굴로 들어가는 경향이 대부분이고, 자신의 감정이나 상태를 이야기로 풀어놓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분이 큐티 노트의 기록을 읽으며 나누는 시간에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큐티 모임이 힘들고 서러워서 우느냐고 물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마음을 움직였고, 새롭게 시작하는 미국 생활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했던 시간을 말씀의 은혜와 평안으로 가득 채우는 것을 경험했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셨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남성 큐티 모임은, 남자들끼리 모여서 우는 시간이 되었다. 남자는 평생 세 번만 울어야 한다고(태어날 때,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 나라가 망했을 때) 배웠던 한국 남자들이, 매주 목요일 저녁 큐티를 나누면서 울었다. 나중에는 하도 울기만 하는 것 같아서, 토요일 아침에 새벽예배가 마치면 자전거도 타자고 했다. 모두 새벽에 차에 자전거를 가지고 와서 산타모니카 해변을 달렸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상쾌하다.
LA에서 사역을 마무리할 때쯤, 큐티의 깊이가 나날이 깊어지던 명영호 집사님(그새 그분이 집사가 되셨다)은, 큐티 모임에서 만난 장로님 한 분이, 성실하게 변화하고 성숙하는 집사님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회사에서 일할 기회를 열어 주셨고, 그렇게 그 회사를 통해 영주권을 받게 되셨다. 그 소식을 나에게 전하시면서, 자신은 이진영 목사를 만나서 말씀묵상도 배우고, 미국에서 잘 정착하는 복을 누렸다고 기뻐하셨다.
뉴저지에서 사역하던 중 우리 가족이 잠깐 LA로 휴가를 다녀왔다. 그때 명 집사님께서 간암으로 투병하고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행기 스케쥴 때문에 만나뵙지 못하고 뉴저지로 돌아올 수밖에 없어서 무척 아쉬웠다. 그리고 며칠 후, 명 집사님의 아내이신 김현민 집사님께서 메시지를 보내셨다. 남편이 이진영 목사님께 큐티를 배워서 말씀 안에 살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고, 간암으로 투병하는 중에도 말씀을 붙잡을 수 있어서 좋았었다는 말을 남기셨다고. 그렇게 집사님은 천국에 가셨다. 그 소식을 금요예배 설교 전에 접하게 되었는데, 설교를 마치고 기도하는 시간에 너무 많이 울었다.
하나님은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변화와 성숙을 향한 길을 도전하며 인도하신다. 그런데 내가 주님과 동행하려고 조금이라도 애를 쓰면, 그 가운데 내가 만나는 누군가도 그의 인생에 터닝포인트를 만나게 된다. 내게 말씀하시는 길을 주저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나를 보면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길을 걸을 준비를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아주 작은 순간이라도 나 때문에 누군가가 주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면, 그보다 더 큰 감격이 어디에 있을까? 그래서 오늘도 힘이 있는 한 포기하지 않고 말씀을 들으려고 하고,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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