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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터닝포인트(13) - 불면증 본문
나는 살면서 처음 불면증을 겪었다. LA에서 교회 사역을 정리하고 어떤 계획도 세우지 못한 채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이, 잠을 못 이루게 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오늘은 뭐 하지? 내일은 뭐 하지? 늘 그런 생각을 했고, 과연 내가 목회를 계속할 수 있을까? 어떤 교회에서 나를 청빙할까? 복잡한 생각이 계속 반복되었다. 그래서인지 매일 잠을 잘 수 없었다. 한 시간 정도 자면 잠이 깨고, 다시 잠이 들어도 삼십 분, 한 시간을 넘겨 잘 수 없었다.
마음을 잡으려고 말씀 묵상에 힘을 더 기울였다. 매일 묵상 글을 쓰기는 했지만, 조금 더 깊이를 가지고 쓰려고 노력했다. 사실 6년 넘게 최선을 다해 사역에 임했기 때문에 쉼을 갖는 것은 필요했던 일이었다. 나는 “주님, 딱 넉 달만 아무 일도 안 하고 쉬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 그렇게 몸은 쉬고 있었지만, 마음을 편하게 하고 쉴 수는 없었다. 가까이 지내던 동역자들의 가족들과 소풍도 가고 재밌는 시간을 가졌었지만, 마음에는 편안함이 없었다.
그러던 중에 멘토 선교사님의 연락을 받았다. 선교사님은 어떻게 지내냐고 물으시면서 나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쉴 수 없으면 중국에 오라고 하셨다. 내 대답은 “중국에는 어떻게 가는 건가요?”였다. 선교사님은 “비자를 받고 비행기표를 사서 오면 된다”라고 하셨다. 중국은 그렇게 가는 것이었다. 영사관에 가서 비자를 받았다. 중국 비자 받기가 그렇게 까다로운지 처음 알았다. 그리고 비행기 표를 샀다. 그런데 비행기가 한국을 거쳐서 가는 비행기였다. 그런데 나는 한국에서 부모님도 뵙지 못하고, 공항만 들렀다가 북경에 도착했다. 선교사님께 드릴 책을 몇 권 싸 들고 무거운 짐을 그대로 들고 갔다. 선교사님은 나를 보시고서, “한국에서 부모님 뵙고 간단한 짐을 가지고 와야지 누가 이렇게 미국에서 중국을 그냥 들어오냐” 하시면서 웃으셨다.
나는 지도자들을 위해 강의를 할 계획이 있었다. 그런데 선교사님 사역하시는 공간이 문제가 생겨서 강의 일정이 모두 취소가 되었다. 다음 날부터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노는 시간을 가졌다. 선교사님과 북경의 여러 관광지를 다니면서 놀고먹었다. 하루는 선교사님께서 바쁘신 일정이 있다고 하셔서 혼자 미국 사람들의 관광팀에 합류해서 관광지 구경을 했다. 그렇게 지내다가 일주일을 보내고 우여곡절 끝에 주일 오후에 중국인 지도자들을 만나서 다섯 시간 정도 강의를 하고 다음 날 한국으로 들어왔다.
북경 공항에서 떠나기 직전에 선교사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절대로 손해 보시는 분은 아니에요. 목사님을 그동안 준비하게 하셨으니 반드시 주님의 뜻에 맞게 쓰실 겁니다. 그러니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잘 쉬어요.”
중국을 떠나기 전날 청빙 지원을 했던 교회 중 한 곳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청빙위원들이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나를 만나러 LA로 오겠다고 하는데 내가 중국에 있다고 답을 드렸더니, LA 우리 집으로 가서 아내를 만나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며칠 되지 않아서 아내는 청빙위원들을 만났고, 내가 서울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분들은 서울까지 오셔서 나를 만나셨다.
청빙위원들을 만난 나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내가 갑작스럽게 담임 목회를 시작하게 되면 어떡하지?” 사실 그때도 나는 담임목사로 준비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LA에 돌아왔을 때 아내는 말했다. “아직 담임목사 되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안 될까 봐 걱정해야 하는데 될까 봐 걱정하고, 되리라 생각해서 걱정하지 말아야 하는데 안 될 테니 걱정하지 않고, 참 이상한 일이었다.
아내의 믿음대로 나는 그 교회 담임목사로 청빙 되지 않았다. 후에 알게 된 것은 그 교회는 영어를 잘하는 1.5세 목사가 담임이 되었다. 다른 두 곳의 교회의 청빙도 되지 않았다. 한 곳은 담임목사 출신을 청빙했고, 다른 한 곳은 이미 내정한 상태에서 청빙 광고를 했다고 들었다. 미국에서 이민교회 담임목사가 되려면 담임 목회 경험이 있거나, 1.5세 또는 2세처럼 영어를 잘하거나, 박사학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런 조건에는 하나도 적합하지 않았다.
그렇게 여름을 보내면서 아내와 나는 멀리 떠나기로 했다. 미국 서남부에서 먼 곳은 미국 동북부일 것이고, 다섯 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고 있었던 시온이에게 더 좋은 음악 교육의 기회를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동부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주하기로 한 곳이 뉴저지주 테너플라이라는 동네였다. 우리는 대륙을 횡단해서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했다.
강준민 목사님께 우리 가족이 뉴저지로 가게 되었다고 말씀을 드렸다. 목사님은 나에게 사역할 교회를 정했냐고 물으셨다. 정해지지 않았다고 말씀드렸더니, 믿음이 좋아서 그런 것이냐고 하시면서, LA에서 사역하다가 뉴저지로 가게 된 목사님이 한 분 계시는데, 그분께 소개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감사했다. 하지만 뉴저지로 가기 전날까지 아무 연락이 없었다.
6월 말에 우리 가족은 뉴저지로 가서 살 집을 알아보았다. 동네에 아파트가 여의치 않아서 집을 렌트할 곳을 찾아다녔다. 렌트비는 2,500~3,000불 정도였다. 그런데도 집 상태는 너무 좋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 집을 찾게 되었고 겨우 렌트 계약을 하고, 우리 가족은 공항에서 하룻밤을 새우며 보내고 LA로 돌아왔다. 이삿짐을 싸고 보내는 날, 아내와 시온이를 한국으로 보냈다. 내가 뉴저지에 가서 이삿짐을 받고 정리하면, 그때 뉴저지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가깝게 지내던 집사님께서 여행을 가신다고 해서 그 집으로 들어가 지내다가, 집사님 가족이 돌아온 후에는 제자의 집으로 들어가서 며칠을 지냈다. 그렇게 LA 생활을 정리하고 뉴저지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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