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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터닝포인트(15) - His Friends,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 본문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15) - His Friends,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

Happy Jin 2020. 9. 5.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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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의 가을은 정말 아름다웠다. 캘리포니아는 Golden State였는데, 뉴저지는 Garden State였다. 그 말대로 나무가 정말 많았다. 물론 미국에 나무가 더 많은 곳도 있겠지만, 7년을 로스앤젤레스에서 살다가 온 내 눈에는 세상이 온통 나무로 가득한 것처럼 보였다. 가을이 되니 단풍이 시작되었다. 미국에 오기 전에 가족과 설악산 단풍 구경을 하러 갔었는데, 뉴저지에서는 따로 단풍 구경을 다닐 필요가 없었다. 모든 길이 단풍의 예쁜 색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가을이 깊어지자 낙엽이 쌓인다. 자꾸자꾸 쌓인다. 어마어마하다. 길의 코너에 모아놓은 낙엽은 옆에서 차가 오는지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그렇게 가을이 지나가나 싶더니 눈이 내린다. 눈이 어마어마하게 내린다. 미국 살면서 7년 만에 처음으로 눈 구경을 했다. 눈을 치우다가 죽는 사람도 있다는데, 정말 그 정도로 눈이 많이 온다. 무릎을 덮는 눈을 삽 하나로 치워야 했다. 위층에 사는 아저씨는 눈을 치우는데 도사셨다. 아저씨가 눈을 치우면 그 길에 눈이 왔었는지 모를 정도다. 눈이 오는 날에는 동네 아이들이 삽을 들고 눈을 치워 주고 돈을 받고 그러는데, 우리 집에 눈을 치우겠다고 들어왔다가 “Wow!” 하고 그냥 돌아선다. 위층 아저씨에게 지지 않으려고 나도 열심히 치웠다. 뭐 이런 경쟁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뉴저지에 도착했던 첫날, 위층 가족과 인사를 했는데, 아저씨는 나보고 직업이 뭐냐고 물었다. 그러더니 여기는 생활비가 많이 들 텐데 어떻게 사냐고 걱정을 하신다. 내가 정말 안 되어 보였나 보다. 테너플라이라는 동네는 교육열이 뜨거운 동네였다. 한국인과 유대인이 많이 살았다. 소문에는 한국에서 강남 8학군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부모들이 찾아오는 동네라고 했다. 시온이는 8학년(중학생) 때부터 테너플라이에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시온이는 LA(정확하게는 South Pasadena)에 살 때는 학교에 가면 친구들 선생님들 만나서 인사하는 일을 즐거워했던 아이였다. 그런데 테너플라이에서 학교에 가니 인사를 받지 않는 친구가 있어서 온종일 따라다니면서 “Hi”를 하고 결국 인사를 받아냈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는 학교에서 친구들이 힘들다, 피곤하다, 죽고 싶다 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낯설다고 했다. 여러모로 살기 어려운 동네였다. 그래도 나에게는 즐거움이 하나 있었다. 뉴욕 맨해튼이 가까웠고,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MOMA 등의 미술관 등이 많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림 감상을 좋아하는 나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가서 그림을 볼 수 있었다.

 

교회를 둘러보니 예배와 모임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 목요일마다 중보기도 시간이 있었고, 수요 저녁예배가 있었고, 금요기도회가 있었다. 새벽기도회도 있었고, ‘큐티나눔방’도 있었다. 그런 사역이 없는 교회가 있나 질문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지만, 주일예배에 모이는 교인 숫자(당시 아이들을 포함해서 2,000명이 넘는)에 비해 너무 적은 인원이 모이는 모임들이었다. 새벽기도회는 20명도 채 참석하지 않는 것 같았고, 금요기도회는 담임목사 청빙이 있기 전까지는 많이 모였다고 하는데 청빙 후에는 얼마 모이지 않았다. 수요예배는 100명이 채 안 되는 것 같았다. 목요일 오전의 중보기도에도 10명 정도가 모이고 있었다. 수요일 오전에는 수요여성예배도 있었다. 교회가 이런저런 사역(모임 위주)을 많이 하는 것 같았는데, 뭔가 힘이 집중되는 것 같지 않아 보였다. 나는 주일 오후의 찬양예배 인도를 담당하고 사역을 시작했다. 찬양팀은 모두 자원자들이었다. 교회의 찬양과 음악 사역자들이 어느 시점부터 사례를 받지 않기로 해서, 음악 전공자들이 많이 떨어져 나갔다고 했다. 그것이 바람직한지는 모르겠다. LA에서 사역할 때는 전공자들의 프로페셔널한 실력과 헌신이 잘 조화를 이루며 사역을 했었는데, 뭔가 부족함이 많이 느껴졌다. 그래도 열심히 즐거운 마음으로 사역에 임하는 형제자매들이 고마웠다.

 

찬양과 예배 사역 외에 내 눈에 많이 들어오는 사역은 세 가지가 있었다. ‘금요기도회’와 ‘목요중보기도회’, 그리고 ‘큐티나눔방’의 사역이었다. 뭔가 약해보이는 이유가 담당하는 사역자가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도 사역도 목회자들이 돌아가면서 사역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중심과 무게를 잡아 주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큐티나눔방 사역은 교역자가 없이 교인들만 모여서 큐티를 나누는 모임이었다.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훈련은 볼 수 없었다. 교인은 많은데, 새벽기도회도 “생명의 삶”이라는 큐티 교재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교회에서 판매되는 “생명의 삶”은 50권 정도만 팔린다고 했으니, 큐티 사역에도 무게가 실려있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나는 기도와 말씀묵상 사역은 관심도 많고, LA에서 사역 경험도 있었기에, 교역자 회의에서 내가 그 사역들을 담당해서 해보겠다고 했다. 물론 그때까지도 1,200불을 받는 파트타임이었다. 교역자로 출근해도 데스크도 없었던 때였다. 그래도 목사가 돈을 받는 만큼만 일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순진한 생각과 목회 사역은 은사와 사명과 재능에 따라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에 해보겠다고 했다. 

 

그렇게 11월이 되었을 때, 담임목사님이 교회에서 풀타임 포지션을 얻으려면, 교회에서 계획하고 있는 장애인 사역을 맡아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다. 그래야 풀타임 사역의 조건에 맞는다고 하셨다. 나는 성인이 된 후 교회의 모든 사역은 다 참여했었다. 교회학교, 고등부, 대학부, 청년부, 선교와 예배 등 안 해본 사역은 없었다. 중등부 사역도 전도사 시절에 영동중앙교회에서 11개월간 했었다. 당시 담임목사님께서 나에게 “이 전도사는 중등부 하면 안 되겠다”고 하시면서 대학부 사역을 맡기셨다. 그런데 그때까지 교회 사역 중, 내가 전혀 관심도 없고 지식도 없고 경험도 없던 사역이 장애인 사역이었다. 나는 목사님께 “제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라고 여쭈었고, 목사님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래야 풀타임 사역을 할 수 있다”고 답변하셨다.

 

많이 고민했다.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보다, “내가 그 사역을 하는 것이 당사자인 장애인들에게 과연 적절한 것일까?”라는 질문이 앞섰다. 그러다가 위대한 영성가들이 장애인들을 섬기는 일을 했었다는 것이 떠올랐고, 나도 그들처럼 장애인들을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사역에 임하기로 했다.

 

담임목사님은 LA에서 밀알선교단 사역에도 참여하시며 장애인들을 위한 사역에 관심이 많으셨다. 뉴저지초대교회에 장애인 사역이 없다는 것을 보고, 사역을 위해 세미나도 여시면서 사역 희망자들을 찾기도 하셨다. 나는 12월부터 풀타임 사역을 하게 되었고, 장애인 사역을 위한 첫 모임을 했다. 15명 정도의 자원자들이 모였다. 그런데 그 중 장애인 사역 경험자가 한 명도 없었다. 첫 모임 때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임이 계속되면서 우리가 필요한 부분을 채워 줄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장애인 사역을 위해 무엇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지,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하는지, 하나씩 아주 기초부터 함께 배울 수 있었다. 

 

교회에는 자폐와 ADHD를 가진 아이들이 있었다. 우선 눈에 띄는 아이들은 네 명이었다. 아이들의 부모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다. 근처에 장애인 사역을 하는 교회들을 찾아갔다. 그 교회 사역의 장단점을 비롯한 장애인들의 가족과 부모들을 만나서 필요가 무엇인지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계획을 세웠다.

 

나는 그동안 장애인 사역에 대해 느꼈던 것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앞으로 장애인 사역에서 꼭 세웠으면 하는 사역 헌신자들의 사역 태도에 대한 원칙을 만들어 말씀드렸다. 불평하지 않기. 하소연하지 않기. 항상 밝은 얼굴로 사람들을 대하기. 사역의 이름도 밝은 이름으로 정하기. 마음을 열고 무엇이든 배우면서 사역에 임하기 등이었다. 이름을 정하기로 하고 함께 사역하기로 한 분들에게 밝고 경쾌한 이름을 만들어 보자고 했다. 다섯 개의 이름이 추천되었고, 후보에 올라온 이름을 교인들에게 공개하고 전체 교인들이 스티커를 붙여주어서 이름을 정했다. “His Friends”라는 이름이 정해졌다. 지금까지는 비밀이었는데, 그 이름은 내가 무기명으로 후보에 올려놓은 이름이다. 아무도 그 사실은 몰랐을 것이다. 그저 공모된 이름을 보고 함께 하는 분들이 추천했고, 교인들의 투표로 뽑힌 이름이다. 이제는 밝혀도 될 것 같아서 밝힌다.

 

His Friends 주일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자폐와 ADHD를 가진 아이들의 부모님들은 한 번도 예배에 안심하고 참석했던 경험이 없으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예배만이라도 편안하게 참석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가 아이들과 함께 예배하자고 준비했다. 3월 첫 주일 예배가 시작하는 날이 되었다. 15명이 넘는 사역 헌신자들이 4명의 아이를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충격이었다. 이미 오기로 약속을 했는데 한 명도 오지 않았다. 나중에 부모님들을 만났다. 부모님들은 “우리 아이가 왜 장애인 예배를 드려야 하나?”라고 하셨다. 아이들이 그렇게 장애인으로 대해지는 것이 마음이 아프셨던 것 같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buddy가 되어주기로 했다. 아이들이 부모님들과 떨어져서, 각 학년 부서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리도록 하고, 정해진 buddy가 아이와 함께 부서 예배에 참여하기로 했다. 아이들이 buddy와 예배에 들어가고, 부모님들은 주일 성인 예배에 참석하면서 많이 우셨다고 했다. 그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예배했던 경험이 너무 오랜만이어서 감격하셨다고 했다.

 

아이들이 buddy와 예배에 참여할 때, 담당 buddy들은 아이들을 잘 돌보면서,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관찰했다. 공통으로 찾은 결과는, 아이들이 즐겁게 예배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buddy가 옆에서 아이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 주기만 한다는 것이었다. 각 부서의 교역자들도 우리 아이들이 한 사람의 예배자가 아니라, 돌봄이 필요한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는 부모님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우리 아이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한다면, 정말 즐겁고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는데, 다른 부서에 들어가면 단순히 돌봄의 대상만 되어야 한다고 부모님들께 말씀을 드렸다. 그렇게 4개월의 기간을 보냈다. 그동안 His Friends의 예배 시간은 아이들을 위한 중보기도의 시간으로 계속 진행이 되었다. 4명의 buddy를 제외한 모든 사역 헌신자들은 3월부터 시작된 예배 시간에 모여서 기도했다. 그리고 2010년 7월 첫 주일 다시 His Friends 예배가 시작되었다. 4명의 아이가 모두 참석했다. 나는 드디어 His Friends 예배의 설교를 했다. 2-3분 정도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동안 전도사 때부터 그때까지 내가 설교했던 경험 중 가장 땀을 많이 흘리고,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 설교였다. 아이들은 한 명도 나를 보지 않았고, 15명 이상의 교사(사역 헌신자)들은 다 아이들만 보고 있었다.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시온이에게 물었다. “너 4살 때 아빠가 너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 줄 때가 좋았어?” 시온이는 “아빠가 손에 인형을 끼고 이야기 해 줄 때 재밌었어”라고 했다. 그때 생각했다. “그래. 이거다!” 다음 주일에 손 인형 두 개를 가지고 가서, 세 개의 목소리로 혼자 이야기를 했다. 아이들은 나를 보면서 짧은 이야기를 들었고, 교사들과도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His Friends 사역이 시작되었다.

 

기도했다.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하는 일에만 만족하지 말고, 앞으로 아이들의 미래를 준비할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하는 시간에 주님은 한 가지를 생각하게 하셨다. “Right Timing, Right Person”, 주님은 가장 적절할 때에 가장 적절한 사람을 보내 줄 것이라고 하셨다. His Friends 사역을 하면서 모든 사역 헌신자는 분명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다. “Right Timing, Right Person” 하나님은 적절한 때에 적절한 사람을 보내 주셨다. 우리는 4명의 아이를 보면서, His Friends에 어린이부와 청소년부를 나눌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 일은 몇 년 후에 실현되었다. 그 지역에 사는 아이들과 부모님들이 교회로 왔다. His Friends에는 약 30명 정도의 아이들이 오게 되었다. 그리고 사역 헌신자들도 30여 명이 모였고, 고등학생부터 참여할 수 있는 자원봉사자들도 30여 명이 있었다. 자원봉사 학생들은 wait-list가 필요할 정도로 많이 지원했다.

 

시온이는 9학년이 되면서(His Friends 사역이 시작되고 2달 후)부터 His Friends의 자원봉사에 참여했다. 그리고 자원봉사 학생들의 회장이 되어서 학생들을 사역을 조정하고, 교사들과 학생들과 아이들 사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그렇게 시온이는 4년 동안 회장으로 섬겼다. 사역에 참여했던 어느날, 어떤 아이가 시온이에게 침을 뱉었다. 옆에서 보던 나도 당황했다. 그런데 아무 일이 없는 듯이 아이와 놀았다. 아이는 그렇게 자기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인지 테스트를 하는 듯했고, 시온이는 아이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His Friends 사역에 참여한 모든 자원자들이 같은 마음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놀고 친구로 지내는 것이 우리 사역의 가장 중요한 방법이었다.

 

주님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실 때가 있다. 내가 잘하는 일들로 남들이 보기에 멋지게 보일 수 있는 일을 시키셨으면 좋겠는데, 먹고 살려고 억지로 하게 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시작하게 만들기도 하신다. 하지만 마음에 딱 드는 동기로 시작하지 않은 일이라도, 내게 맡겨진 일에 순수한 마음과, 함께 하는 사람들을 위하는 마음을 갖고 시작하면, 생각지도 못했던 복된 일들을 만나게 하신다. 사람들을 보면서 가슴이 벅차게 하시고,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고 볼 수 있게 하신다.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내가 원하는 일을 이루는 도구가 아니다. 하지만 기도로 하나님과 대화를 계속하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에 내가 함께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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