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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터닝포인트(18) - 정죄보다 사랑이 먼저일텐데 본문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18) - 정죄보다 사랑이 먼저일텐데

Happy Jin 2020. 9. 24.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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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제 아들이 떠났어요.” 교인 한 분의 전화를 받고 당황했다. 그동안 상당히 많은 교인의 장례를 집례하고 참석했지만, 교인 자녀의 죽음 때문에 장례에 참석하는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어떻게 공감할 수 있을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서울에서 전도사 사역을 하던 때, 벽제 근처의 고양동이라는 동네에 살았었다. 집에서 논현동의 교회로 출퇴근을 하면서, 주로 지하철을 탔지만, 차로 다닐 때는 집 근처 벽제승화원(벽제 화장터) 앞을 지나다녔다. 당시에는 장례식도 몇 번 참석하지 못했던 때라 화장장의 모습도 궁금해서 하루 날을 잡아 구경하러 들어갔다. 여기저기를 살펴보다가, 아이를 잃은 부모와 가족들이 아이를 화장하기 위해 온 것을 보았다. 아이를 먼저 보낸 엄마는 들어올 때도 거의 실신 상태로 들어왔고, 화장을 마치고 나가는 길에도 몇 번을 울다가 쓰러졌다. 그냥 지켜보고만 있던 내 가슴도 아리는 것을 느꼈었다. 매점에 갔더니 화장장에 왔던 유족들이 고인을 향해 쓴 추모의 글을 모은 책이 있어서 한 권 샀다. 지금까지도 돈을 주고 사서 1/3도 못 읽고 덮은 책은 그 책이 유일하다. 책을 펴서 몇 줄을 읽을 수가 없을 만큼 가슴이 시리고 아팠기 때문이다.

 

아들을 잃은 성도님의 연락을 받고 장례식에 참석하기로 했다. 뉴저지에서 4시간 정도 거리의 D.C. (워싱턴 DC)에서 장례식이 있었다. 함께 사역하던 권사님과 집사님을 모시고 D.C.까지 내려갔다. 가는 도중에 권사님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 그분의 아들이 자살했다고 하셨다. 사고도 아니고 자살이라니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자녀의 죽음, 자살 등에 대해서는 이미 겪은 일들이 있어서 조금은 담담했다. 그런데 권사님이 그 아들이 동성애자였고, 커밍아웃한 후,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았고, 아들이 다니던 교회에서도 정착할 수 없어서 D.C.로 가서 혼자 일을 하며 살았었는데,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하셨다. 

 

D.C.에 있는 한 미국 교회에서 장례식이 열렸다. 거의 300명 이상의 조객들이 왔다. 그런데 드레스코드가 보라색이었다. 나와 유족들과 교회에서 조문을 하러 간 몇 분을 제외하고 모두 동성애자들이었다. 주변에 동성애자들이 있다는 이야기만 들었던 때였고, 당시까지만 해도 뉴스나 미디어로만 접했지, 내가 같은 공간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상상도 하지 않았었다. 나는 유심히 그들을 살펴보았다. 모두 한 형제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고 있었다. 아버지에게서 버림을 받고, 교회에도 발을 붙이지 못한 아들은,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많은 큰 도시로 가서 살았고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자신이 버는 돈으로 많은 사람을 도우며 살았다. 그리고 그의 마음에 있는 두려움과 불안과 낙심을 어떻게든 선한 행실로 이겨보려 했었다. 하지만 견디기가 너무 힘이 들었던 것 같다.

 

함께 장례식을 다녀온 분들과 동성애에 관한 공부를 하기로 했다. 자료도 많이 없었던 때라 공부하기 쉽지 않았고, 전문가도 없었기에 각자 조사해온 정보를 공유하며 나눔을 가졌다. 깊이 공부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우선 아는 것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동안 교회에서는 동성애는 죄라는 말만 했지, 동성애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아들을 잃은 분과 만났다. 그동안의 이야기를 들었다. 마음이 많이 힘드셨을 텐데, 그래도 잘 추스르고 계셨다. 그런데 교회에서 몇몇 어머니들이 그분께 만남을 요청하셨다고 했다. 그분이 이야기가 조금씩 전해지면서, 교회 안에서도 자녀들의 동성애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부모들이 그분께 면담을 요청한 것이다. 이미 교회 안에 자녀들의 동성애 문제로 고민하는 부모들이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아니 교회에서는 그 문제에 대해서 아무도 받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도리어 정죄당하고 버림받게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동안 아무도 말을 못 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분의 이야기가 알려지자 고민하던 어머니들이 그분에게 자신의 상황을 말하며 면담을 요청한 것이었다.

 

비교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His Friends 사역을 시작했을 때도 부모들의 두려움은, 자녀들이 특별한 존재 또는 정상이 아닌 존재로 취급당할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을 힘들게 했다. 교인들이 자기 자녀들을 불쌍히 여기거나 또는 심지어 죄인 취급하거나 하는 일들, 또 그런 관점으로 보는 시선들을 경험했고, 예측이 되기에 힘들어하는 부모들이 많았다. 그래서 자신에 대해서 또 자녀들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을 하지 못했다. 항상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교회에서도, 자신이 고민하고 있다는 것조차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실상 말을 한다고 해도 누가 올바른 지식으로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는 불신도 있었을 것이다. 교회는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도 없으면서 항상 선과 악을 판단한다. 목사도 장로도 무엇이든 선과 악의 기준을 스스로 정하고, 천국행과 지옥행을 판단한다. 

 

교회에서 갑자기 정해진(?) 부목사의 임기 때문에 사역이 종료되는 시점에, 담임목사 청빙을 위해 지원한 교회들과 여러 차례 인터뷰를 했었다. 교회마다 인터뷰에 똑같이 등장하는 질문이 있었다. “목사님은, 동성애자들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심지어는 “동성애자들이 목사님께 성경 공부를 하자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지만 어떤 교회도 “우리 교회에 동성애자들이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함께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을까요?”라고 질문하지 않았다. 나의 대답은 항상 똑같았다. “동성애자들이라고 해서 왜 더 특별한 죄인이라고 생각해야 합니까?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 왜 문제가 됩니까? 혹시라도 같이 성경을 공부하자고 하면 못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분명히 그 교회들은 나에게 바라는 답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내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답을 해 주어야 하나? 담임목사 청빙이 입학시험도 아니고. 아무튼, 나는 그 교회들의 청빙에는 모두 탈락했다. 에임스반석교회는 나에게 그런 질문은 하지 않았다. 이미 교단에서 동성애에 대한 분명한 입장이 있고, 내가 그 입장에 동의했기에, 나는 교인들에게 내가 동의한 동성애에 대한 교단의 입장을 설명하면 되었다.

 

교회가 사람을 아끼고 사랑했으면 좋겠다.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소외되고 버림받았다고 느끼더라도, 교회에서는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함부로 판단하거나 강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목사가 선과 악, 천국행 지옥행을 결정하는 일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목사에게 “누구누구는 천국에 갔어요? 지옥에 갔어요?” 그런 질문 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교회에선 그런 질문 안 한다(목사가 대답을 안 해 주니).

 

이 글을 읽고 또 어떤 분이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목사님은 동성애자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굳이 나에게 답변을 바란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려고 한다. “나는 당신도 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먼저 세상을 떠난 그 아들이, 세상에서 느끼지 못했던 아버지의 따뜻한 품을, 우리 아버지 품에서 느끼며 평안을 누리고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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