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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터닝포인트(27) - 회심 본문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27) - 회심

Happy Jin 2020. 12. 22. 0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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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일곱 번째 이야기 – 회심

 

에임스에서 목회를 시작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주일 예배 설교 후에 교우로부터 질문을 하나 받았다. “목사님은 ‘창조과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갑작스럽게 들어온 질문에 나는 많은 생각을 해야 했다. 

 

‘창조과학’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LA에서 사역하던 중에는 교회에 초청된 이재만 선교사의 강의를 듣기도 했다. 창조과학 세미나는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접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배우고 알고 있던 과학의 내용이 성경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창조과학에서 밝혔다는 내용들을 보니, 역시 과학보다 성경에 대한 신뢰가 더 견고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몇 차례에 걸쳐서 창조과학 세미나를 들었고, 교회의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창조과학 탐사여행을 가게 되었다. 그랜드 캐년을 중심으로 하는 창조과학 탐사여행을 통해서, 창조과학에 대한 지식을 더 얻을 수 있었다. 창조과학 탐사 여행을 마친 후에 교회 목회자 중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떻게 창조과학 같은 것을 신뢰할 수 있느냐는 말에, 어떻게 성경에 대해서 그러한 불신을 가졌으면서 목회를 할 수 있냐고 대꾸할 정도로, 나는 당시에 창조과학에 대해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 이재만 선교사와 몇 차례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실 정도로 친분도 생겼다. 그후에 뉴저지에서 사역을 하게 되었을 때, 이재만 선교사를 뉴저지로 초청해서 세미나도 열었다. 교인들과 창조과학 탐사여행을 지속적으로 가질 계획도 세웠다. 나는 인솔자의 역할로 창조과학 탐사 여행에 다시 참여했다. “처음이 좋았다!” “진화의 반대는 성경이다!” 이런 구호와 같은 외침이 탐사 여행과 세미나에서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그 탐사 여행에서 이전보다 더욱 강하게 강조되었던 것이 ‘젊은 지구론’이었다. ‘젊은 지구론’을 접하면서 나는 질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인류 문명의 역사만 생각해도, 지구의 나이를 6,000년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무리가 있을 것 같았다. 성경에 나온 사람들의 나이 만을 계산해서 지구 나이를 6,000년 정도라고 하는 것은 너무 큰 오차를 만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과학을 더 깊이 공부했거나, 역사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있었으면 질문도 하고 토론도 했었을 텐데 당시에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넘어갔다.

 

그후에 페이스북에 이재만 선교사와 창조과학회를 비판하는 글이 보이기 시작했다. 특별히 서울대 천문 과학부의 우종학 교수가 대표적으로 창조과학을 비판했었다. 처음에는 그 비판이 매우 불편했다. 그래서 내가 아는 창조과학의 지식을 가지고 페이스북에 우 교수와 그와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 비판하는 글을 쓰고 올렸다. 그들이 성경을 믿지 않는 것 같았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도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토론하고, 더구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믿음 안에서 서로의 생각이 다양한 견해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과학이라는 것이 증명된 사실을 가지고 원리를 세우는 것인데, 그것에 대해서 판이하게 다른 견해가 있는 것을, 다양성이라고 하면서 모두 인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우종학 교수의 글을 조금 더 자세히 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페이스북 친구를 맺었다. 그리고 또 캐나다 VIEW의 양승훈 교수의 글도 읽으면저 조금씩 공부했다. 공부하는 중에 나는 조금씩 왜 창조과학이 비판을 받는지 이해가 되었다. 나는 창조과학에서 주장하는 내용들 중에서 과학적 오류가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동안 나의 생각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대학시절에 SOUL 전도여행을 함께 했던 노종문 형제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형, 우종학 교수는 좋은 그리스도인이에요.. 너무 비난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라는 메시지였다. 처음에는 좋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왜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당황스럽게 하느냐고 답했다. 종문 형제는 나에게, 마크 A. 놀의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이라는 책을 읽어보라고 권유했다. 마침 교회에서 책을 구할 수 있어서 읽을 수 있었다. 내용이 어렵기는 했지만, 복음주의적 반지성주의의 폐해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창조과학에 대한 비판 의식이 생겼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는 창조과학 세미나가 상당히 영향력을 가지고 진행 중이었다. 이에 헌신하는 교인들도 많아지고 있었다. 그렇게 된 원인을 내가 제공했고, 나는 아직 나의 생각들에 대해서 충분한 지식이나 균형을 잡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에, 약간 갈팡질팡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뉴저지를 떠나 에임스로 오게 되었다. 

 

에임스에서 교인으로부터 창조과학에 대한 질문을 받은 후에, 이에 대해서 분명한 입장을 취하려면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우종학 교수의 “과학 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이라는 책을 주문했다. 책이 오기 전까지 나는 내 생각을 두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성경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과학적, 역사적, 논리적 지지를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떨어지지 않는다. 둘째, 믿음의 길에서 진영 논리를 가지고 서로를 적대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다. 말씀을 해석하고 믿고 따르는 것이 신앙의 기본인데, 그 안에 다양한 해석과 태도가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가능하면 서로 협력하고, 협력이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서로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생각을 정리한 후에 가능하다면 우종학 교수를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내가 배우지 못해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설명을 듣고 싶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 김동호 목사님이 우종학 교수와 대화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금 나의 기억으로는 김동호 목사님께서 창조과학 세미나를 다녀오신 후에 은혜를 받으셨다는 글이 페이스북에 포스팅이 되자, 많은 사람들이 왜 목사님이 창조과학을 옹호하느냐고 비판했고, 그 후에 김동호 목사님께서 우종학 교수와의 대화 시간을 제안하셨다. 그리고 첫 만남의 이야기가 페이스북에 올라왔다. 그리고 며칠 후 우종학 교수가 2017년 시카고 코스타에 참여하기 위해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마침 주문한 책도 도착했다. 책의 서론을 읽는 중에 나는 크게 은혜를 받았다. 노종문 형제가 그를 좋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마침 시온이를 만나기 위해 클리블랜드에 다녀 올 일이 생겼고, 다녀오는 길에 시카고를 들러서 우종학 교수를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짜고짜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냈다. 그랬더니 금세 답장이 왔다. 시카고에 내가 들를 수 있는 날이 목요일이었고, 마침 목요일 점심은 코스타 참가자들이 금식하는 시간이라, 외부에서 둘이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있다고 했다. 나는 우종학 교수와 두 시간 정도 대화했다. 나는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 내가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을 질문했고, 나의 생각들에 대해서도 말했다. 우 교수는 내 이야기를 경청했고 성실하게 답변했다. 무척 친밀한 교제를 나눈 느낌이었다. 우종학 교수는 내가 읽은 책 보다 먼저 쓴 책인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라는 책을 선물로 주었다. 나는 그 책을 받으면서 제목이 “무식한 목사,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라고 보인다고 말했다. 

 

사실 나는 2016년 초에 서울에 있을 때, 서향교회를 개척해 섬기는 문지웅 선배가, 우종학 교수를 초청해서 세미나를 할 계획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왜 그렇게 위험한 인물을 초청하려고 하냐고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우 교수를 만난 후에, 미국에 다시 올 기회가 있으면 꼭 에임스에 와서 우리 청년들을 만나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리고 그 일은 이제 COVID-19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때에 실현이 되었다. 2021년 1월 말에 에임스반석교회 청년들의 겨울 수련회 때, 우종학 교수의 특강과 만남이 온라인(Zoom)으로 있을 예정이다.

 

우종학 교수와의 만남은 나에게 회심과 같은 사건이었다. 만남 이후, 나는 페이스북에 나의 회심 사건(?)에 대한 글을 올렸다. 교회 교인들 중 많은 분들이 나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까지 했다. 물론 그동안 나를 알고 지내면서 나의 창조과학적 입장에 지지를 보냈던 사람들은 나와 페이스북 친구 관계를 끊기도 했다. 얼마 되지도 않는 페친들 중 상당히 많은 수를 그때 잃었다.

 

우 교수와 만남을 가진 후에 나는 내 생각을 다시 두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은혜는 회심하게 하고, 배움은 확신하게 한다. 둘째, 잘못된 배움과 가짜 은혜는 독화살을 만든다. 

 

앞의 글(스물여섯 번째 글)에서 말한 것처럼, 나는 낯섦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무엇인가 잘못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어떤 면에서는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하지만 낯섦에 대한 두려움에 묶여서 결단하지 않으면 계속 어영부영하게 되고 우유부단에 빠져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계속 그렇게 머물러 있으며 그 결과는 나 혼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특별히 목사들이 큰 착각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확신이 항상 옳은 것이어야 한다는 착각이다. 그래서 목사일수록 변화를 두려워한다.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에 대해 부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잘못된 것을 바꾸는 것은 실패가 아니다. 바꾸어야 하는 것은 빨리 바꾸어야 한다. 고집을 부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정말 실패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변화는 실패가 아니다. 성숙의 과정이다. 배우지 않으면 변화할 수 없다. 용기는 고집을 부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용기는 변화와 성숙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믿음은 내가 가진 확신이 변함없는 진리라고 고집부리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고 따르는 것이다. 내가 가진 확신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하심 안에서 나의 생활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배우고 고치며 새롭게 되어야 한다. 믿음은 그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신뢰하는 것이고, 변화와 성숙의 길로 나아가는 일에 두려움을 버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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