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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터닝포인트(29) - Redefine 본문
스물아홉 번째 이야기 – Redefine
나는 네 살 때부터 교회에 다닌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 벌써 50년째 교회 생활을 하는 것이다. 교회 생활을 하면서 너무 익숙해진 용어들이 있다. 이제는 아무런 고민도 없이 선택하고, 선택하기 위해 시간이 들지도 않고 반사신경처럼 쉽게 많이 쓰는 말들이 있다. 그런 말들은 언제 어떻게 배웠는지 모르겠다. 왜 그런 말을 써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오랫동안 사용하고 있어서 습관적으로 쓰는 말이 되어 버렸다. 잠시라도 말을 하기 전에 자신이 왜 그 말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면,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는데,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그 정도 말은 써야 하는 줄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 말들을 나는 교회 생활 용어라고 말하고 싶다.
교회 생활 용어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뉴저지에서 사역할 때, 수요 여성 예배 때 처음 교회를 나오신 분이 있었다. 교회라는 곳을 처음 나오셨다고 했다. 옆집에 사는 가정이 남편 직장 상사 가정인데, 그분들이 교회를 다니시기에 아이들을 교회에 보내면 착하게 살 것 같다는 생각으로 교회에 보내다가, 자신과 남편도 교회에서 처음 예배를 드렸고, 그러다 수요일 오전에 여성들만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는 소식을 듣고 또 나와봤다는 것이다. 그분은 ‘설교’라는 용어도 처음 들었다고 하신다. 예배 시간에 자리에 앉아 있으니 사람들이 같이 노래를 하고, 앞에서는 좋은 강연을 하는 것 같아서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고 하셨다. 그분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믿기로 했다. 하지만 워낙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라 자주 연락도 드리지 못하고 지나는 길에 얼굴을 보면 잠깐 안부를 물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세례 교육을 하는 시간에 그분이 참석을 하셨다. 세례를 받기 원한다고 하셨다. 기쁜 마음으로 교육을 마치고 나가는 길에 인사를 했는데, 그분이 가까이 오셔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목사님, 저 요즘에 찬양 시간에 손을 들고 찬양을 해요.” 나는 놀라서 어떻게 그렇게 되었냐고, 무슨 계기가 있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분이, “교회를 1년 정도 다니다 보니까, 사람들이 어떤 시점에서 어떤 분위기에서 손을 들고 찬양하는지 알게 되어서, 저도 분위기를 감지하면 손을 들고 찬양을 하게 됐어요.”라고.” 하셨다.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좋기도 했지만, 교회 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눈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교회에서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이 너무 많았다. 성경을 읽으라는 말은 하고, 성경 강의는 하지만, 왜 그런 용어들을 사용하는지, 왜 그렇게 찬양하는지, 왜 설교를 듣는지 등은 그저 눈치가 좀 있어야 알 수 있는 것이 많았다. 눈치가 빠르면 신앙생활을 잘하고, 눈치 없으면 신앙 생활에도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
나는 교회 사역을 하면서 기도에 대해서 오랫동안 강의를 했다. 기도에 대해서 강의를 하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기도할 때 사용하는 언어가 과연 적절하게 사용되는 것일까? 사실 그렇지 않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기도는 하나님께 나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도에 사용되는 언어가 자신의 마음을 잘 담을 수 있는지, 자신의 생각을 적절하게 담고 있는지는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사역하는 에임스반석교회는 거의 모든 기도 담당자들의 기도가 매우 진지하고 신선하다. 그런데 가끔 느끼는 것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신 분들보다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분들의 기도가 더 신선하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한 이유, 사용하는 언어들이 습관적인 언어가 아니고 마음을 담아낸 솔직하고 담백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 용어를 선택했는지 이유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가장 흔하고 대표적인 기도 언어 습관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예배 기도 담당자가 기도가 마칠 때쯤 “지금 예배가 시작하니 마치는 시간까지…”라고 하는 것이다. 예배는 이미 10분 또는 15분 전에 시작을 했는데, 왜 자신의 기도가 마치는 순간에 “지금 예배가 시작한다”라고 하는 것일까? 한 번은 갑작스러운 궁금함에 그렇게 기도하신 장로님께 여쭈었다. 장로님은 대답을 어려워 하셨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니까 당신도 그렇게 하셨다고 대답하셨다. 왜 다른 사람들의 기도가 내 기도에 그대로 들어와 있을까? 조금만 생각하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왜 생각하지 않고, 고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 것일까? 꼭 그러한 기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으면, 예배가 시작한 지 몇 분 지났는지 확인하고, 예를 들어 “14분 전에 예배가 시작하였으니, 마치는 시간까지…”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러한 습관적 기독교 용어들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쉽게 듣고 흘려보낼 수 있다. 하지만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에게는 매우 생소한 용어들이라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앞의 글에서도 언급을 했었는데, LA에서 사역할 때 “Seeker’s Service”를 기획하고 섬겼던 때가 있었다. Seeker’s Service에 나오는 대상자들은 교회에 처음 나오는 분들이었다. 따라서 그분들을 위해 신경을 써서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았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 기도는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예배 순서였다. 보통 예배 기도를 교회의 장로들이 해야 하는데, 오랜 시간 교회에서 예배 기도를 했던 분들이,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해서 기도를 할 수 있을지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장로들을 모두 모셔다가 기도에 대해서 다시 훈련을 하기는 더 어려웠다. 그래서 결정한 것이 기도문을 작성하고 배경 음악과 영상에 기도문을 올려서 예배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었다. 100번 정도의 예배를 드리는 동안, 매번 예배의 설교와 관련된 기도문을 시처럼 만들었다. 가장 단순하고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런데 나도 무척 어렸을 때부터 교회 생활을 했던 사람이라, 기도문을 쉬운 용어로 쓴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Seeker’s Service의 기도는 무척 좋았다. 2분 정도의 시간에 상영되는 기도문에(기도시)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했었다.
교회의 담임목사로 사역을 시작하면서 나와 같이 교회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타성에 젖은 또는 겉치레로 하는 신앙생활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특별히 에임스반석교회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분이 몇 분 없다. 지금은 두 분 외에는 모두 나보다 어리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조금이라도 더 확실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신앙의 기초를 더욱 단단하게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사역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몇 가지를 실천에 옮겼고 대표적인 것이 습관적으로 타성과 겉치레로 하는 교회 생활 용어들을 바꾸는 것이었다.
에임스반석교회에서 첫 예배를 드리고 그다음 주일부터, 예배가 마친 후에 문 앞에서 악수하며 인사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나는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했다고 인사를 받는 것이 늘 어색한 사람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예배를 마치고 나가는 사람들이 “목사님, 은혜 받았습니다”은혜받았습니다”라고 습관적으로 인사하고 지나치는 것이 늘 어색했다. 그리고 나는 그 인사를 받을 때마다 질문이 있었다. 진짜 은혜를 받은 것일까? 왜? 어떻게? 그래서 실제로 질문도 했었다. 누군가 예배 후에 나에게 와서 “목사님, 설교에 은혜를 받았습니다”라는 인사를 했을 때 나는, “어떤 은혜를 받으셨나요?” “은혜를 받으셨으면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건가요?”라고 물었다. 아마 이런 질문을 받으면 겨우 조금 받았던 은혜가 다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내가 물어보는 이유는 “은혜를 받았다”라고” 인사를 한 그분에게 어떤 변화와 도전이 있었는지 알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예배가 마친 후에 하나님께서 마음에 주신 감동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시간을 내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또 받은 도전이 있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목사에게 그런 마음을 전하고 싶다면 그 내용을 짧게 나누면 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목사에게 은혜를 받았다고 습관적으로 인사를 하고 나간다. 그리고 그렇게 받았다고 한 은혜는 식사 시간에 또는 집에 가는 순간에 다 사라져 버린다. 하나님의 은혜가 목사에게 인사하는 말로 사용하라고 주신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이러한 생각으로 교회에서 예배 후 문 앞에서 인사받는 것을 하지 않았다.
에임스반석교회는 예배당으로 사용하는 미국 교회와 1년에 한 번씩 연합예배를 드리기로 했고 진행 중이다. 지금까지 연합예배 때 두 번 설교를 했다. 영어로 설교했다. 예배가 마친 후 우리 교회 교인들은 모두 다른 문으로 나가서 식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미국 교회 교인들은 나에게 와서 인사도 하고 많은 이야기를 했다. 어떻게 영어와 한국어를 둘 다 잘할 수 있느냐는 인사는 듣는 나조차 놀라웠다. 나에게 영어를 잘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미국 사람들이다. 그토록 천천히 하는 영어를 그분들은 친절한 눈빛으로 경청한다.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한 번은 다윗에 대해서 설교를 했고, 예배가 마친 후 한 미국 교회 교인이 다가왔다. 그리고 나에게 “오늘 설교를 통해서 다윗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수 있었고, 내가 가지고 있었던 약점에 치우치지 말고, 가지고 있는 것들을 활용하며 약하다고 생각한 것들을 극복하라는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항상 오늘 말씀을 기억하고 되새기면서 변화를 위해 노력하려고 한다.”라고.” 했다. 그렇게 설교를 마친 후에 자신이 받은 도전과 감동을 자세하게 목사에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만난 경험이 많지 않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반응을 경험한 것이다. 요즘은 우리 교회 교인들도 아주 가끔 설교가 마치면 메시지를 보낸다. 질문도 하고 깨닫게 된 내용들을 전해 주기도 한다. 자주 경험했으면 좋겠다.
교회 생활 용어 중에 개인적으로 사용하지 않기로 한 단어도 하나 있다. ‘영적으로’라는 말이다. 물론 이 말을 쓰지 않고 설교를 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정말 많은 경우에 등장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이 말을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쓰지 않기로 작정한 이유는, 신앙생활이 나의 전인격적인 삶으로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번도 설명을 듣지 못했고 이해가 되지도 않은 ‘영적’이라는 말을 과연 어떤 영역으로 생각하고 말씀을 그 부분에만 적용하는 것은 전인격적인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요인이 된다고 생각한다. 성경을 공부하다 보면, 영적인 일과 육체적인 일은 분명히 구별된다. 그런데 그 구별은 우리가 어떤 동기로 행동을 하는지를 구별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다. 그에 비해서 우리가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영적’이라는 것은 어떤 동기가 아닌, 신앙생활의 행태 또는 결과로 나타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우리의 육체를 포함한 모든 일상이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된 영의 주관 하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계속해서 ‘영적’이라는 말로 신앙 생활의 영역을 일상과 구분하면, 결국 이원화된 삶에 빠지게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능한 ‘영적’이라는 말을 자제하고, 우리의 생활, 일상,,일상, 삶을 전체적으로 말씀으로 조명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나는 주일예배 설교를 통해서 교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교회 생활 용어 중에 ‘재정의(redefine)’가 필요한 용어들을 새롭게 정의하고 설명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 용어들을 제목으로 해서 시리즈 설교를 하는 것도 생각해 보았지만, 성경을 전체적으로 강해를 하는 중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들을 그 본문에 맞추어서 생각하고 정리해서 재정의 하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된 단어가 ‘거룩’이라는 말이었다.
잘 알고 있듯이 ‘거룩’이라는 말은 ‘구별되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죄로 물든 세상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구별되게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런데 교인들은 어떻게 거룩하게 되는지, 구체적으로 거룩한 생활이 무엇인지 생각하거나 고민은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교회에 나오면 거룩하다고 하는 무리들 속에 섞여서 예배에 참석하고 있으면, 거룩한 사람이 저절로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서 거룩하다는 것은 어떤 장소에서 잠시 갖추는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들의 생활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야 하는 하나님 자녀의 본질이고 덕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거룩하다’는 말에 다음과 같은 새로운 정의를 내렸다.
“거룩하다는 것은 대표로 구별되어 책임을 다하고 사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백성이 거룩한 백성이 되길 원하셨다. 하나님의 보물로,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온 세상 백성에게 옳은 길을 인도하는 제사장 나라로, 거룩한 민족으로 살아갈 것을 명하셨다.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출애굽기 19:5~6)
‘거룩하다’는 말을 새롭게 정의를 하니, 거룩한 백성, 하나님의 자녀, 교회 공동체로서의 사명을 조금 더 구체화해서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단지 거룩하게 보이는 특정한 장소에서, 거룩하게 보이는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와 책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살더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애를 써야 한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자녀들을 부르신 이유는, 거룩한 하나님을 닮아서 거룩한 백성으로 세상에 나타나서, 하나님을 대표하는 구별된 사람으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세상을 위해 대표로 세우신 이유이다. 따라서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본질을 온전히 갖추는 것이다.
LA에서 사역할 때 멘토이신 목사님은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용어들에 새로운 의미들을 부여하고, 명제와 같이 각인되게 만들어 주셨다. “감사는 받은 것을 받았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지혜는 지식을 활용하는 능력이다.” 등,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용어들과 내용이지만 새롭게 재배열된 명제들은 생각을 깨우는 일에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그렇게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하지만 그 의미가 희미해지거나 약화되는 교회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을 앞으로도 계속 새롭게 정의해 보려고 한다. 그동안 나의 인생에서 겪었던 터닝포인트는, 앞으로 나의 인생에서 함께 진행될 모든 사역들, 그리고 하나님 나라 복음의 가치들을 새롭게 정의하는 “Redefine”으로 발전할 것을 기대해 본다. Redefine은 우리에게 주어진 가치의 본질을 더욱 분명하게 조명하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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