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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터닝포인트(30) - 놓쳐서 아쉬운 터닝포인트 본문
서른 번째 이야기 – 놓쳐서 아쉬운 터닝포인트
터닝포인트라는 제목으로 글을 계속 쓰다 보니 내가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좋은 결정을 해서 지금까지 온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조금 다시 기억을 되살리니 “아! 그때를 놓친 것이 아쉽다."라고 생각하는 순간들도 꽤 있다.
나는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나의 부모님은 왜 아들을, 그것도 어린아이를 피아노 앞에 앉게 하셨는지 모르겠다. 어쩌다 보니 집에는 검은색 호루겔 피아노가 있었다. 부모님은 나와 동생에게 태권도 등의 운동을 배우게 하지 않고 피아노를 배우게 하셨다. 처음 피아노를 배운 곳과 선생님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두 번째 선생님에게는 상당히 오랜 시간을 배웠다. 선생님은 소나티네, 소나타 뿐만 아니라 체르니 연습곡까지도 완전히 외워야 다음 진도를 진행하셨다. 그래서 나보다 피아노 경력이 많지 않은 친구들도 이미 체르니 50번을 치고 있을 때, 나는 체르니 40번을 배우는 중이었다. 그래도 4학년과 5학년 때는 피아노 콩쿠르에 나갔고, 처음에는 장려상으로 입상을 했지만, 5학년 때는 1등을 했었다. 그러다 6학년이 되어서 사춘기가 시작되었는지, 피아노 앞에 앉는 것이 싫어졌다. 지루했고 힘들었다. 선생님께 너무 오래 배워서 지루해진 것은 아닌가 싶어서, 사촌 누나들에게 피아노를 배우기로 했었다. 그런데 누님들 중 한 분은 너무 무섭게 가르쳤고, 다른 누님은 너무 쉽게 가르쳐 주셨는데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결국 6학년 마치기 전에 피아노 레슨을 중단했다. 조금씩 철이 들면서 피아노를 계속 배우지 않은 것이 아쉽다. 멋지게 소나타를 연주하고 싶은데 잘 되지 않는다. 최근에 콩쿠르에서 1등했던 곡을 다시 쳐보려고 하는데, 그렇게 달달 외웠던 곡이 손가락이 돌아가지 않아서 어렵다.
피아노는 나에게 또 하나의 아쉬운 터닝포인트를 기억하게 한다. 앞의 글에서도 소개했던 캐나다 어학연수 1991년에 있었던 일이다. 캐나다에 갔을 때 외삼촌과 인연이 있는 가정을 만났다. 오래 전에 한국인 여자 아이가 캐나다의 한 부부에게 입양이 되는 일에 외삼촌이 도움을 준 일이 있었고, 그 가정이 캐나다 에드먼턴에 살고 있어서, 당시에 함께 갔었던 나와 내 동생과 외사촌 동생들을 집으로 초대했었다. 그 집에 들어갔는데 그 집은 그때까지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펜트하우스였다. 입양되었던 여자 아이는 내 또래였고, 입얀한 부부 중 남편은 돌아가셨고, 할머니만 계셨다. 그런데 무척 큰 거실에 멋진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다. 누가 피아노를 치냐고 물었는데 아무도 연주하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피아노를 쳤다. 잘 치는 건 아니지만 기억하는 곡으로 연주를 했다.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연주했다. 그 할머니께서 너무 좋아하셨다. 그리고 나에게 “우리 집에서 같이 살자. 공부도 하게 해 주고 필요한 것 다 해줄 테니, 가끔 피아노만 치면 된다.” 그 소리를 듣고 한국에 전화를 해서 부모님께, 내가 캐나다에 계속 사는 것은 어떻겠냐고 여쭸다. 부모님은 ““정신 차리고 어학연수 마치면 집에 와야지!”라고 대답하셨다. 만약 그때, 조금 더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그 집에 머물렀다면 아마 내 인생은 크게 달라졌을 것 같다. 영어도 아주 잘하는 1.5세 사역자가 되지 않았을까? 돈 걱정은 전혀 없는 환경에서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그 집은 상당히 부잣집이라, 입양한 딸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해주는 집이었다. 가끔 영어 때문에, 돈 때문에 걱정할 일이 생기면, 30년 전 터닝포인트가 될 수 있었던 그때가 생각난다.
중학교에 들어갈 때, 친구와 기타를 배우기로 했다. 둘이 같이 클래식 기타를 배웠는데 당시에 EBS 방송에서 ‘기타를 배웁시다’라는 프로그램이 있었고, 열심히 배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친구는 계속 클래식 기타를 배웠고, 나는 클래식 기타를 포기하고 포크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서 나는 교회에서 찬양을 인도하게 되었다. 가끔 같이 기타를 배웠던 친구나 또 가까운 지인들이 클래식 기타 연주하는 영상을 볼 때면 너무 부럽다. LA에서 사역할 때 훌륭한 기타 연주자들을 만났었다. 보통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기타를 메고 인도를 하지만, 나는 내가 기타를 연주하며 찬양 인도를 하는 것이 불편했다. 더 나은 연주자들의 소리를 듣고 노래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때로는 내 기타 연주가 방해된다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지금은 기타를 치면서 찬양을 인도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조금 더 깊이 훈련하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느끼는 순간이 많다.
나는 초등학교 때 웅변을 해서 그런지 목소리가 큰 편이다. 지금도 찬양팀에서 노래를 하면 내 소리가 다른 사람들 소리를 다 잡아먹는 것 같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노래하는 것이 너무 좋았다. 학교에서 잘하는 중창팀이 있었는데, 1학년 때는 별 흥미가 없어서, 합창부에 들어가서 노래는 했지만 중창단은 지원하지 않았었다. 그러다 2학년 때 노래가 너무 하고 싶었고, 남성중창의 매력을 많이 느꼈다. 나는 학교에 또 하나의 남성중창팀을 만들었다. 몇 기까지 지속되었는지는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내가 3학년이 될 때에 1학년도 중창팀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함께 노래하는 친구들의 교회를 이곳저곳 다니면서 찬양곡을 불렀다. 그러다 나는 어느 날 굳은 결심을 하고 음악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 저 성악 전공하고 싶어요. 할 수 있을까요?” 선생님은 한 마디 하셨다. “늦었어. 아주 특별한 재능은 아닌 것 같은데 지금 시작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나는 선생님께 “그럼 음악을 전공하고 싶은데, 작곡은 어떨까요?” 선생님은 “피아노 칠 줄 아니?” 물으셨고, 내 연주를 잠깐 들으시더니 “그냥 공부해서 대학가라.” 말씀하셨다. 그때 나는 쉽게 포기하고 말았다. 미국에 와서 교회에서 만나는 성악가들에게 잠깐 성악 레슨을 받은 적이 있었다. 나를 가르치는 분들은 나에게는 타고난 성량과 좋은 음색이 있다고 하면서, 왜 성악을 전공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레슨을 지속하지 못했고, 소리를 완성할 수는 없었다. 요즘 '팬텀 싱어' 등의 음악 프로그램을 보면서, 고등학교 때 조금 더 밀어붙여서 노래를 공부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뉴욕에서 뮤지컬을 봤을 때도, 만약 어렸을 때 뮤지컬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따라다니면서 노래를 공부하고 지금쯤 노래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가끔 이렇게 인생을 돌아볼 때가 있다. 그 순간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 순간 내가 그 일을 계속했다면, 나는 얼마나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었을까 생각하는 때가 있다. 사실 그런 순간은 매일 계속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싶다. 말을 한마디 해도 그 말을 왜 그때 했을까 하고 생각하고, 방향을 왜 이렇게 잡았을까 하는 후회가 섞인 일들도 가끔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면 많은 고민을 한다. 목사에게 어느 길이 더 좋겠냐고 묻기도 한다. 어떤 것이 나은 선택이 될지 심각하고 진지하게 오랜 시간 고민한다. 하지만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나라는 사람이 정말 다른 인생을 살았을까 하는 질문을 해본다. 지금 나의 환경이나 삶을 바꾸고 싶은 마음은 있을지 모르지만, 나라는 사람의 본성과 생각이 얼마나 다른 인생을 살아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이 잘못된 선택 때문일까?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내 몫을 살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 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 많은 순간이 앞으로도 자주 찾아올 것이다.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면서 아쉽게 느끼는 점들이 있다면 앞으로 있을 선택의 순간에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조금 더 신중하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나 스스로를 만드는 '지금'을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글을 쓰다 보니 소개한 나의 아쉬운 터닝포인트 이야기는 거의 음악과 연관된 것이다. 그만큼 내게 음악에 대한 아쉬움이 크기 때문인 것 같다. 더 좋은 노래를 만들고 싶고, 더 좋은 목소리로 노래를 하고 싶고, 한국에서 끌려온 피아노도 더 좋은 연주로 소리를 내도록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 때문에 음악에 대해 아쉬운 마음이 크다. 그래도 기회를 만들고 계속 연주하고 만들 수 있다면 앞으로 남은 시간 즐거움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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