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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2) - 부르셨다면

Happy Jin 2020. 9. 5.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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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가 되려는 나의 마음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변함없이 이어졌다. 다른 직업들에 대한 생각들은 점점 멀어졌다. 얼마 전에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보면서 의사를 안 하기로 한 것(?)은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의사보다 목사가 쉽다는 것은 아니다.

 

고등학생 때 다니던 교회의 담임목사님과 만나는 시간이 있었다. 목사님께서는 목사가 되기로 생각했다니 신학교를 가겠지만, 곧장 신학대학으로 가지 말고, 일반대학을 가라고 하셨다. 일반대학에 가서 세상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 보고 배우라고, 그리고 신학교 가면 전도할 기회도 별로 없으니, 일반대학에 가서 전도도 하면서 지내라고 하셨다. 나도 목사님의 말씀에 충분히 동의했다.

 

고등학교 1학년이 마치고 2학년에 올라갈 때, 이과로 방향을 잡았다. 담임선생님께서 적성검사가 이과로 나왔다고 하셔서, 별다른 질문이나 확인도 없이 이과를 선택했다. 이후 고2 때부터 고3 때까지의 고생은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생략하고… 대입 학력고사를 마치고 학교와 과를 선택할 때 담임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진영아, 너는 적성검사가 문과인 애가, 왜 이과를 와서 2년 동안 고생을 했니?” 나는 너무 놀랐고, 담임선생님은 “아마 네가 2학년 올라갈 때 이과 반을 늘리면서 웬만큼 공부하는 애들은 이과로 보내서 그렇게 되었나 보다”라고 하셨다. 

 

수학과를 선택했다. 대학교수이셨고 입시 상담을 EBS에서 많이 하셨던 외삼촌께, 어떤 과가 제일 문과랑 가까운 이과인지 여쭈었고, 외삼촌은 수학을 하면 철학과도 연결이 되니까 괜찮지 않겠냐고 하셨다. 단지 그 이유로 점수에 맞추어서 가장 문과 같아 보인다는 수학과로 진학을 했고, 나는 더 깊은 수렁으로 빠졌다. 같은 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한 친구는 수학이 과목에서 없다고 좋다고 나를 약 올렸다. 그리고 첫 시간에 들어온 교수님은, “이제 자연 수학의 시대는 갔다. 응용 수학을 해야 한다”는 벼락같은 말씀을 하셨고, 나는 어떻게 이 수렁을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을지 고민하며 대학 생활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대학을 졸업만 하면 신학대학원을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지냈다. 대학생 시절에 나는 학교와 교회 선배들과 함께 여름과 겨울로 전도여행을 다녔다. SOUL이라는 이름의 모임은 후에 소개하려고 한다.

 

전도여행은 서울에서 버스로 출발하면 대전의 과학기술대학교에서 합류하는 지체들을 태우고 전라남도 고흥군 녹동까지 8시간 동안 가는 길이었다. 나는 버스를 타면 멀미를 심하게 하는데, 더구나 광주에서 녹동까지 3시간 이상의 길은 당시에는 너무 굴곡이 심해서 많이 힘이 들었다. 

 

그러다 한 번은 전도여행에 선교사님 한 분이 함께 하셨다. 8시간 동안 함께 하는 지체들은 자리를 옮겨가면서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내가 선교사님과 함께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되었다. 선교사님은 나에게 대학 졸업하고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물으셨고, 나는 늘 하던 대로 졸업하면 신학대학원에 가고 목사가 될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선교사님은, “목사가 되어서 뭘 하려고 해요?”라고 물으셨다.

 

나는 “목사가 목사 노릇을 하면 되는 것이지, 목사가 되어서 무엇을 해야 한다고 답을 꼭 해야 하나?” 생각을 하면서도, 목사도 뭔가 특별하게 해야 할 일이 있나 생각해 보다가, 당시에 많이 사용하게 된 단어, “worship leader”라는 말이 생각이 났고, 선교사님께 “예배 인도자”가 되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답을 드렸다.

 

그러자 선교사님은, “예배라는 것은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인데, 그 일을 위해 섬기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아주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죠. 주님께서 형제에게 그 중요한 일을 맡기신 것 같네요.”라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worship leader가 그냥 찬양 또는 찬양 집회 등만 인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기타를 치면서 찬양을 인도했으니, 목사가 되어서도 그렇게 계속하면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조금 멋진 단어를 사용해서 말씀드린 것인데, 그 일이 신앙생활의 중심을 위한 섬김이고, 그 일이 중요하고 무거운 짐이라는 말씀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일주일 정도의 전도여행 동안 내 머릿속에는 “예배 인도자”라는 단어가 떠나지 않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더 깊이 생각해야겠다는 부담, 그리고 책임감까지, 그리고 그 일은 지금까지 나의 모든 삶에 중심을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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