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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터닝포인트(4) - 어디에서 어떻게 만날지 본문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4) - 어디에서 어떻게 만날지

Happy Jin 2020. 9. 5.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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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2월에 입대를 했다. 수색이었나? 그 근처 56사단에 입소를 했다. 18개월 단기사병(방위)으로. 4주 훈련을 받고 집 근처에 있는 한미연합군사령부에 배치를 받았다. 용산 미군 부대 안에 있어서 그 안에는 모두 카투사만 있는 줄 아는 분들이 있는데, 그 안에도 한국 군인 현역 60명과 방위 30명이 있었다. 현역들은 참모 사무실 등에서 통역을 하는 영어 잘하는 병사들이었다. 카투사 시험 결과 1등과 2등은 카투사로 안 보내고 연합사로 보낸다는 소문이 있었다. 방위 30명은 그냥 동네 사는 청년들이었다. 아마 연합사 내의 잡일을 위해 소집 되었다고 하면 적당한 것 같다.

 

나는 신체검사 때 시력이 좋지 않아서 4급을 받아 방위가 되었고 집에서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다른 방위들 보다 좋았던 것은 출입 때 위병소가 없어서 미군부대를 지키는 Security Guard에게 연합사 신분증만 보이면 언제든 출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난 쉬는 날에도 미군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고 들어간 적이 있었다. 공짜니까.

 

한미연합군 사령부 내에서 나의 보직은 사령부 본관 관리병이었다. 한미연합군 사령부 본관에는 한국군과 미군을 합해서, 대장(별 넷) 둘을 비롯해 장군이 16명 있었다.  사령관은 미군 대장(당시에 유엔군 사령관, 8군 사령관, 한미연합군 사령관을 겸임했다)이고, 부사령관은 한국 육군 대장이었다. 그랬던 본관을 관리하는 병사였으니, 아무도 쉽게 나를 오라 가라 하지 못했다. 나도 때로 선임이 나를 이용하려고 하는 것 같으면, "제가 지금 사령관실 카펫 세척을 해야 하지 말입니다." 이거 딱 한 마디면 아무도 못 건드렸다. 내가 눈치를 보아야 하는 사람들은 선임이 아니고, 사령부 안에 있는 장군들이었다.

 

나는 매일 새벽 4시에 출근해서 사령관과 참모들 출근하기 전(보통 미군 장군들은 아침 7시 경에 사이클을 타고 출근한다)에 본관 전체를 청소했다. 그리고 10시에 다시 복도와 화장실과 외부 청소를 하고, 3시쯤 또 청소를 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돌아다니지 않는 시간에 청소를 했다. 그 사이에는 각 사무실의 필요한 일들(전등 교체, 카펫 세척 등)을 하는 것 외에 특별한 일은 없었다. 그러다 가끔 한국군 내무반 쪽에서 지원을 요청하면, 식당일이나 페인트 일, 잔디 정리와 한남동의 공관 관리 등을 돕기도 했다.

 

한 번은 장교들의 테니스 코트 철망 페인트를 해야 한다고 불려 갔다. 높은 철망 위를 칠해야 하는데 갑자기 나타난 선임이 굳이 자기가 사다리 위에 올라가서 칠을 하겠다고 나에게 밑에서 사다리를 잡고 있으라 했다. 그러더니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손에 들었던 페인트 통을 놓쳐서 밑에 있던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짙은 초록색 페인트를 뒤집어썼다. 난리가 났다. 나는 선임의 손에 이끌려 장교들이 사용하는 목욕탕으로 갔고, 물로 지워지지 않는 곳은 선임이 페인트를 지우는 신나로 닦았다. 빨리 지워야 한다는 조급함에 아무 생각도 없이 무엇으로 나를 닦는지 신경 쓰지 못했다. 아무튼 초록 인간이 연합사에 나타난 소문은 한국 군인들 사이에 금세 퍼졌다. 결국 신나 때문에 피부는 엄청 상했고, 눈은 초록색 아이섀도를 칠한 것처럼 되어서 며칠을 지낸 기억이 난다. 아무튼 그 일로 나는 더 이상 선임들에게 불려 다니지 않게 되었다.

 

나와 같이 일을 하던 군무원 아저씨 아주머니는 참 좋은 분들이었다. 가끔 같이 밥을 해 먹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나중에 목사가 될 사람이라는 것을 아신 후로는 나를 무척 편하게 해 주셨다. 아저씨는 담배가 끊어지지 않는다고 나에게 기도부탁을 자주 하셨다. 내가 교회 대학부 회장이라는 것을 아시고는, 수련회 기간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을 나보다 더 아쉬워 하시더니, 새벽 청소만 같이 마치고 수련회에 가라고 하셔서, 마침 천마산 수양관에서 있었던 수련회에 사흘동안 오전부터 밤까지 계속 참석하고, 새벽에 천마산을 뛰어 내려와서 첫차를 타고 출근해서, 새벽 청소를 하고 수련회장으로 가고 했던 기억이 있다. 혹시 선임이나 사령부에서 나를 찾으면 사령관실이나 참모실 카펫 세척을 보냈다고 하시기로 했다. 하지만 며칠 동안 그 누구도 나를 찾지 않았다고 했다. 연합사령부 길 건너편에 중앙경리단이 있었는데, 그 때 방위로 있었던 교회 선배 형이 위병을 서고 있을 때, “나 수련회 다녀올게”하고 인사했던 기억이 난다.

 

본관 2층 구석에는 작은 스낵코너가 있었다. 영어를 잘하는 한국 아주머니가 햄버거와 샌드위치와, 과자 그리고 음료수와 커피를 파셨다. 복도 청소를 하다가 그 앞으로 가면 가끔 햄버거도 주시고 음료수도 주셨다. 미국 사람들이 먹는 햄버거라 다른 햄버거랑은 맛이 달랐다. 튜나 샐러드 샌드위치는 그 때 처음 먹어 보았다. 음료수 중에 ‘마운틴 듀’가 있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시중에는 판매하지 않았었다. 몇 년 뒤에 홍대 앞 카페에서 ‘마운틴 듀’를 팔기에 가격을 알아보니 한 잔에 4000원이라고 해서 기겁을 했던 적이 있다.

 

스낵코너 옆에는 큰 회의실이 있었는데, 2월 첫 주 월요일에는 미군 장교들이 새벽부터 몰려왔다. 슈퍼볼을 본다고. 그런 때는 나도 미군들과 함께 슈퍼볼을 봤다. 슈퍼볼은 뭐하는지 모르면서 그냥 신나서 봤다. 그러면서 누가 음료수나 팝콘을 쏟지 않는지 관찰해야 했다. 끝나자마자 청소를 해야 했으니.

 

잠시 시간을 건너서, LA에서 사역할 때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한 자매가 자기 부모님이 한국에서 오셨는데 목사님이 오셔서 아버지 어머니께 복음을 전해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댁으로 심방을 가서 자매의 부모님을 뵙는 순간 그 아버지를 보고 너무 놀랐다. 낯이 많이 익은 분이었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한 후 두 분은 감사하게도 예수를 구주로 믿겠다고 하셨다. 상처가 많았던 딸이 미국에 와서 치유가 되고 교회에서 같이 예배를 드렸는데 좋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게 되니 믿음을 가져야겠다 생각했다고 하셨다. 그런데 두 분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그래서 앞으로 교회에 다니려면 사는 동네도 옮겨야 한다고 하셨다. 꼭 그렇게 어려운 결정을 하실 이유를 여쭈었더니, 자신은 군인 출신이고 군대에 있을 때 절도 지었을 만큼 군과 불교에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혹시 한미연합군 사령부에서 인사참모를 하셨던 장군님 아니시냐고 했더니, 어떻게 아냐고 하시며 놀라셨다. 당시에 본청을 관리하던 병사였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그래도 시간이 15-6년이나 지났고, 몇 번 마주치는 일이 없었을 텐데 기억하는 것이 신기하다고 하셨다. 내가 그분을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혹시라도 본청에 계신 장군들의 얼굴을 몰라 실례를 범하지 않으려고, 구석방에 장군들의 사진을 보면서 늘 얼굴과 이름을 외웠기 때문이고, 복도에 걸려 있었던 참모들의 사진 액자를 매일 깨끗하게 닦았기 때문이었다. 그분은 교회 생활을 꾸준히 잘 하셨다. LA에 오실 때마다 내 사무실에 오셔서 신앙생활의 여정을 말씀해 주시면서 신앙이 자라고 있음을 보여 주셨다.

 

나는 내 보직에 후임이 들어오는 것을 못 보고 제대(소집 해제)했다. 또 나와 같이 들어간 동기들은, 모두 대학 2학년 전방입소 훈련까지 마치고 들어와서 21일의 혜택을 받아 제대했고, 나는 2학년 때 전방입소 훈련을 거부(?)해서 열흘밖에 혜택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혼자 전역 신고를 했다. 전역 신고 후에 아저씨 아주머니와 청소를 마치고 오후가 되어서 퇴근 겸 제대를 했다. 같이 일했던 아저씨 아주머니는 나를 늘 ‘복덩이’라고 하셨다. 한미연합군 사령부에는 매년 대통령이 왔는데, 내가 복무하는 동안은 한 번도 대통령이 오지 않았다고 제대하는 날까지 나를 ‘복덩이’라고 하시며 고마워하셨다.

 

내가 선임이 되었을 때 후임들은 천국이었다. 선임을 만날 일도 없으니 편했을 것이고, 혹시 만나더라도 착한 선임이라 괴롭히지도 않고, 내가 조금 잔소리 같은 걸 하려고 하면, “이 상병님이 뭐라 하시는 건 진짜 우리가 잘못한 거다”라고 하면서 알아서 기고 그랬다. 내가 없을 때는 어떻게 했었는지 모르지만.

 

아! 내 선임 중에 밴드 ‘동물원’의 유준열 씨가 있었다. 가끔 편안한 시간을 보낼 때면 노래해 달라고 졸랐던 기억이 난다. 다른 노래보다 유준열이 만든 ‘말하지 못한 내 사랑’, ‘무전여행’ 등이 제일 좋다고 아부하면서 노래를 불러달라고 했었다.

 

군대 이야기 같지 않은 군대 이야기, 이 시절도 나에게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억에 가득하다. 총이 아닌 걸레와 빗자루와 청소기를 들고 다녔고, 군복이 아닌 청소하기 좋은 옷(?)을 입고 다니면서 화장실 변기를 하루 세 번 이상 닦으며 지냈다. 아마 어지간한 건물 청소에는 거의 전문가 수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혼자 그 일을 했다면 그저 지긋지긋한 1년 반이라고 생각되어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만났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미소를 띨 수 있으니 다행이다.

 

그리고 18개월 동안 나는 시편을 깊이 공부했었다. 김정준 박사의 ‘시편 명상’을 붙잡고 읽으면서, 나도 시편 150편의 연구와 묵상 노트를 만들었었다. 이사를 다니다가 분실한 그 노트들이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아깝다. 아마 지금 읽으면 창피해서 읽을 수 없겠지만 그땐 무척 자부심을 가질만한 노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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