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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7) - 사역 시작

Happy Jin 2020. 9. 5.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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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95년 초까지 보성교회를 출석했다. 내가 4살 때부터 다녔으니까, 거의 23-4년을 다닌 셈이다. 1994년에 고 이범구 목사님께서 은퇴를 결정하셨고, 새로운 담임목사가 보성교회에 부임했다. 장로님이셨던 아버지께 청빙 하게 된 결정적 이유를 여쭈었더니, 그분이 담임으로 사역하던 교회에서 타던 승용차가 ‘프라이드’(당시 기아에서 나온 소형차)라고 하시면서, 검소한 분이라고 하셨다. 나는 아직도 그것이 왜 담임목사 청빙의 결정적 이유가 되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새로운 담임목사님의 설교와 목회는 아내와 나를 힘들게 했다. 더구나 신학교에 진학하고 목사가 되려고 준비하는 나는 주일마다 어려움을 겪었다. 나는 기어이 아버지께 “나는 총신신대원 안 가고 다른 신학교에 가도 좋으니 교회를 떠나야겠다”라고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멘토 목사님께 전화를 드렸다. 총신을 졸업하고 저런 목사가 된다면 총신 가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멘토 목사님은 내게, “다른 건 모르겠고, 총신에 가서 말씀 사랑하는 법을 배워라. 그리고 교회는 싫어서 떠나면 안 되고, 주님께서 너에게 가라고 하실 때까지 기다리고, 싸인을 주시면 그때 떠나라.” 그렇게 말씀하셨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참아보려고 작정한 후 얼마 되지 않아서, 문지웅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너 예배 찬양인도 사역할 준비가 되어 있지? 예배 찬양 사역자를 찾는 교회가 있는데 한 번 가볼래?” 당시에 나는 신대원에 진학하지 못한 상태였다. 한 번 시험을 봤는데 탈락하고, 준비하는 시간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조건은 필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이미 대학을 다니던 중에 고 이범구 목사님의 손에 이끌려 노회에 가서 목사후보생 고시를 얼떨결에 보고 통과되어서, 이미 노회 목사후보생의 자격이 있었다. 그래서 자격에 문제는 없었던 것 같다.

 

1994년 12월 어느 날 저녁, 논현동의 영동중앙교회를 찾아갔다. 당시 담임목사이셨던 전동운 목사님을 만났다. 목사님은 나와 대화를 나누시고, 1995년 1월부터 교회에 나와서 사역을 하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나는, “제가 2월에 아내와 같이 이스라엘에 다녀 올 계획이 있어서요. 3월부터 사역을 하겠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고, 목사님은 내 의사를 받아 주셨다.

 

3월이 되어서 영동중앙교회를 찾아갔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오면 온다고 연락을 하고 와야지 그냥 오느냐고 하시면서 적잖이 당황을 하셨다. 내가 처음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라 상당히 어리바리했던 것 같다. 장로님들께 인사를 하고, 원로 목사님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담임목사님께서는 나에게, 아직 찬양팀도 꾸려지지 않았으니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교회에서 할 수 있는 사역들을 하나씩 찾아보자고 하셨다. 그래서 처음 사역은 고등부 성가대 지휘자였다. 고등부에는 사역을 하던 전도사님(임출호 목사)이 계셨고, 나는 전도사님의 사역을 도우면서 고등부 성가대를 지휘하며 찬양 사역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교회 전체 찬양 사역은 금요기도회 찬양 인도를 하면서 시작했다. 매주 금요일 밤에 거의 40분 정도 찬양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피아노 반주자와 함께 내가 기타를 치면서 찬송을 인도했다. 권사님들께서 많이 좋아해 주셨다. 

 

그 후에 고등부에서 졸업생들이 생기고, 찬양팀을 구성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팀을 만들고 찬양예배 준비를 했다. 영동중앙교회 사역이 시작된 지 3년째 되는 해에, 담임목사님과 당회의 허락을 받아서, 어느 주일 저녁예배를 찬양예배로 내가 인도를 하게 되었다. 교회 어른들 예배에서는 처음으로 드럼 소리(드럼을 올려놓을 수 없어서 드럼 패드를 사용했다)가 나고, 워쉽 댄스 팀이 춤을 추며 찬양을 했고, 1시간 30분 이상 찬양을 드리며 예배가 진행되었다. 전통적이며 보수적이었던 교회는 어른들의 예배에서 그동안 겪어보지 못했던 경험을 하게 되었다. 찬양을 인도할 때 성도들에게, 일어나서 찬양하자 권했는데, 몇 분의 장로님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시고 팔짱을 끼고 못마땅한 눈초리를 보내셨다. 그런데 옆에 있던 부인 권사님들의 강제 기립 집행(?)으로 억지로 서서 찬양을 하시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모두 행복한 모습으로 예배를 마쳤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 나는 이미 총신 신학대학원 재학 중이라, 학교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집으로 전화가 왔다. 장로님 중 한 분이었다. “이진영 전도사님입니까?”라고 물으시고는, 내가 확인이 되자마자 “일개 교육전도사가 교회 예배를 엉망으로 만드는 일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라고 하시면서 한참을 소리치시고 전화를 끊으셨다. 아침 식사를 한 것이 모두 거꾸로 올라왔다. 나는 학교로 가려던 길을 돌려서 담임목사님을 찾아갔다. 목사님께, 이런 소리를 듣게 내버려 두신다면 사역을 그만하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목사님께서는 “나를 믿고, 교인들을 위해서 계속 사역을 해라”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계속 찬양 사역을 감당했다. 당시에 세 달에 한 번씩 찬양예배를 인도했다. 교회는 점점 찬양예배에 익숙해졌다.

 

그 후 영동중앙교회에서 나는 대학부 사역도 하게 되었다. 찬양사역도 계속 이어졌다. 목사님께서는 나에게 제자훈련과 전도폭발 사역을 준비할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리고 영동중앙교회 대학부에서 처음 제자훈련을 위해 섬길 수 있었다. 그때 만났던 제자들은 지금까지도 나에게는 귀한 열매들이고 주님 앞에서의 영광이다. 

 

내가 처음 전도사 생활을 시작하고 목사 안수를 받을 때까지, 영동중앙교회는 나에게 사역자로서 좋은 기초를 배우며 쌓을 수 있었던 곳이다. 상당히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강남 한복판의 교회였지만 화려하지 않은 담백한 목회를 배울 수 있는 곳이었다. 유학을 준비하면서 교회를 떠날 때까지 귀한 사랑을 받았다.

 

사역 마지막 날, 주일 저녁예배 설교를 하게 되었다. “당신의 진보를 보이십시오”라는 제목으로, 디모데전서 4장 15절을 본문으로 설교했었다. 그날은 교회 대학부 야구 리그 경기가 있었다. 대학부 학생들이 나에게 선발 투수 역할을 마지막으로 하게 해 줄 테니 꼭 야구를 하자고 했다. 주일 오후에 학생들과 와이셔츠를 입은 채로 땀 흘리며 야구(4이닝 투구)를 하고, 겨우 목욕탕에 가서 씻고, 셔츠를 부랴부랴 말리고, 저녁 예배 설교를 했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예배를 마친 후 학생들과 몇몇 집사님들과 교회 앞마당 등나무 밑에서 손을 잡고 기도했다. 다시 만날 때는 우리 모두가 더 진보한 모습으로 만났으면 좋겠다고 축복해 주셨던 집사님(고 이윤구 집사님)의 인사가 아직도 기억난다. 모두 그렇게 성장하고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로 살아가고 있는지, 그립고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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