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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터닝포인트(8) - 떠남과 만남 본문
우리 가족은 미국행을 결정했다. 나는 Fuller 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과정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2002년 12월 10일 영하 12도의 날씨에 한국을 떠났다. LAX에 도착했을 때, 날씨는 무척 따뜻했다. 한국 같으면 늦은 봄 날씨로 느껴졌다. 보성교회 고등부 교사를 할 때 가르쳤던 정인석이 먼저 USC 유학을 와 있었다. 그리고 어렸을 때 한 동네 살았던 동생 친구의 동생인 김수진도 LA에서 치과의사로 있었다. 두 사람이 우리가 LA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데리러 나왔다. 한인타운 근처에 있었던 인석이의 집에 짐을 내려놓았다. 처음 밟은 미국 땅이었는데 불안하지 않게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잠시 낮잠을 자고 저녁에 일어나서 밥을 먹으러 갔는데, 우리 가족은 아직 한국에 있는 줄 알았다. 미국에 무슨 한국 간판이 그렇게 많은지 놀랐다.
한국에서 출발하기 얼마 전, 중학교 동창 류용수에게서 뜬금없이 이메일이 왔다. 미국에 온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언제 올 것인지, 어디로 오는지 궁금하다고. LA로 간다고 연락을 했더니, 자기도 LA 근처에 살고 있고, 부동산을 하고 있다고 해서 얼마나 안심이 되었는지 모른다. 용수의 도움으로 일주일 쯤 지났을 때, South Pasadena에 아파트를 구했다. 한국에서 보던 아파트가 아니어서 놀라기도 했다. 중고차도 하나 구입했다. 한국에서 보낸 이삿짐도 잘 도착했다. 그렇게 미국 생활이 시작되었다.
미국에서 맞이하는 첫 주일. 수진이가 다니는 LA 온누리교회에 가보기로 했다. 유진소 목사님이 담임이셨다. 한국에서 온누리 교회에 가끔 갈 때 만나 뵌적도 있어서 반가운 만남을 가질 것으로 기대했다. 교회에 처음 온 사람들은 목사님과 함께 식사를 한다고 해서, 몇 명의 새가족과 함께 교제 시간을 가졌다. 목사님은 나를 기억하지는 못하셨다. 그리고 목사라고 했더니 처음 환영해 주시던 얼굴 빛이 약간 변하셨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이민 교회에서는 목사가 교회에 왔다고 하면 부담을 가진다는 것이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두 번째 주일에는 남가주 사랑의 교회를 가보았다. 예배가 마친 후에 뭔가 붕 떴다가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예배 후에 목사님을 만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꼭 대통령이 국민들과 악수를 나누듯이 하는 모습이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12월 마지막 주일, 동양선교교회를 찾아갔다. 열린예배라는 이름의 예배를 참석했는데, 주보에 보니 예배 인도를 정종원 목사님이 하신다고 나와 있었다. ‘정종원!”
정종원 목사님은 내 인생에 무척 중요한 찬양을 품게 하신 분이다. 여기서 갑자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대학생 시절 나는 보성교회에서 찬양을 인도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시작한 찬양인도는 계속 이어져서 대학부 때도 찬양을 인도했다. 내가 대학생 시절에는 한국이 민주화 운동에 힘을 쏟던 때였다. 교회에서 부르는 찬양 중에도 사회와 민족을 품고 하는 노래들이 꽤 많이 있었다. 수련회 때도 물론 그런 노래들을 더 많이 불렀다. 그런데 당시 수련회 강사로 오셨던 분이 나를 부르셨다. “진영 형제 우리 찬양할 때 주님을 더 많이 생각하고 찬양하면 좋겠는데, 이 찬양을 하면 어떨까?”하면서 소개해 주신 찬양이 “여호와의 친밀한 사랑은”이라는 곡이었다. 그 노래를 만든 분이 정종원 목사님이었다. 그 후에 정종원 목사님의 앨범 ‘임마누엘’을 구했다. 그리고 예배 때마다 내가 선택하는 찬양곡은 약간 변화가 생겼다.
결혼 후, 전도사 사역을 시작하기 전이었다. 하루는 꿈에 백두산 천지에 올라간 꿈을 꾸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내가 찬양을 인도하게 되었다. 내 입에서는 알지 못했던 찬양이 흘러나왔다.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처음 부르는 찬양을 인도하는 것이 이상했지만, 큰 은혜와 감동에 잠겼었다. 그리고 꿈이 깨었는데, 그날 오후에 어디선가 그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고, 그 찬양이 정종원 목사님의 곡이라는 것을 알았다. 보통 꿈에서 처음 듣는 곡은 내가 만들어야 하는 곡인데, 이미 있던 곡을 꿈에서 처음 만나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내 백성을 위해 울라!” 그 찬양을 하는 중에 주신 주님의 음성이었다.
그리고 영동중앙교회 대학부 사역을 할 때, 학생들이 어느 날 정말 은혜로운 찬양을 하고 있었다. “이 땅에 오직 주밖에 없네” 그 찬양이 내 마음을 울렸다. 학생들에게 누가 만든 곡이냐고 물었더니, 정종원 목사님의 곡이었다.
그렇게 세 번이나 내 인생에 충격을 준 찬양을 만드신 분이, 내 눈 앞에서 예배를 인도하신다. 나는 너무 놀랐고 감사했다. 사실 동양선교교회를 가게 된 것은 당시 담임목사님이셨던 강준민 목사님을 만나기 위한 것이었는데, 나는 예배 내내 내 눈 앞에서 찬양을 인도하시는 정 목사님께 온통 마음을 집중하고 있었다. 예배 후에 강준민 목사님께 인사는 드렸지만, 정 목사님을 붙잡고 한 번 만나 뵙기를 청했고, 강 목사님 보다 정 목사님과 먼저 인사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후에 동양선교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정종원 목사님과 함께 예배 사역을 할 수 있었다. 새벽예배 때, 금요예배 때, 그리고 주일 열린예배 때도 간혹 예배를 인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정 목사님과 지금까지도 좋은 교제를 이어오고 있다. 에임스반석교회에 와서 처음으로 외부 강사를 초청하는 부흥회에도 정종원 목사님을 모셨다. 그리고 나는 기회만 되면 정 목사님께 “여호와의 친밀한 사랑은”을 불러달라고 부탁드린다. 아니 조른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 같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바뀌기도 한다. 책을 통해 사람을 만나도 그렇고, 노래를 통해 사람을 만나도 그렇다. 주님은 내가 만나게 되는 모든 순간들을 통해 나의 길을 인도하신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시고, 평안을 누릴 수 있도록 하시고, 큰 도전을 주기도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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