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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32)
Happy Hol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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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 20살 때로 기억한다. 대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하나 발견했다. 학생들이 별로 많이 찾지 않을 것 같은, 종교 기독교 섹션에서 “김교신 전집”을 찾았다. 말로만 들었던 분의 책을 만나게 된 것이다. 기쁜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읽을 때마다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글은 “제12,000일의 감(感)”이라는 글이었다. “12,000일에 1일의 생명을 더 허하시옵거든 단 하루라도 족하오니 제발 생명의 용약이 있게 하옵소서. 과실은 없기를 기대하지 못하오나 생활 원칙, 생명의 본질만은 제발 주 당신의 것으로써 살게 하시옵소서.”(댓글에 김교신의 "제12,000일의 감" 전문이 있습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많이 울었다. 햇빛이 들어오는 도서관 창가에서 누가 볼까 숨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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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물론 대학생 시절에 전도 여행 등으로 열심히 돌아다닌 경우는 있었다. 그런데 돌아다니고 싶어서 다닌 것이 아니고 해야 할 일이라 했다. 나는 잠자리가 바뀌면 잠을 못 잔다. 베개만 바뀌어도 잠이 오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서 더 그런 경우가 많다. 그래서 차로 여행을 할 때는 아내가 꼭 내 베개를 챙긴다. 나는 집 안에 며칠을 가만히 있으라고 해도 아무 불만이 없는 사람이다. COVID-19 시대를 보내면서 “Stay Home”을 나는 크게 불편해하지 않는다. 평소 일상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다. 나는 잠깐씩 현관문 밖에서 바람을 쐬고 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교회에서의 일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교회 사역을 하면서도 심방과 수련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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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1년 부교역자 생활을 했다. 사역을 시작했던 교회에서 부목사들이 담임목사님 앞에서 다투는 광경을 보았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엇을 더 많이 가지려고 무엇을 놓치지 않으려고 그러는 것일까? 그렇게 얻고 지켜봐야 부목사인데, 왜 저렇게 욕심을 부릴까? 물론 자신들에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지 모르고, 심지어는 정의를 위해 다투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욕심과 사람에 대한 시기가 이미 다 비치는데, 강단에 서서 설교하면 사람들은 자신을 거룩한 사람으로 볼 것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자신에게 좋은 말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편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싸우는 목사들을 보고 담임목사님은 많이 힘이 드셨는지, 일개(?) 전도사인 나에게 어떻게 하면 좋..
“목사님, 제 아들이 떠났어요.” 교인 한 분의 전화를 받고 당황했다. 그동안 상당히 많은 교인의 장례를 집례하고 참석했지만, 교인 자녀의 죽음 때문에 장례에 참석하는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어떻게 공감할 수 있을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서울에서 전도사 사역을 하던 때, 벽제 근처의 고양동이라는 동네에 살았었다. 집에서 논현동의 교회로 출퇴근을 하면서, 주로 지하철을 탔지만, 차로 다닐 때는 집 근처 벽제승화원(벽제 화장터) 앞을 지나다녔다. 당시에는 장례식도 몇 번 참석하지 못했던 때라 화장장의 모습도 궁금해서 하루 날을 잡아 구경하러 들어갔다. 여기저기를 살펴보다가, 아이를 잃은 부모와 가족들이 아이를 화장하기 위해 온 것을 보았다. 아이를 먼저 보낸 엄마는 들어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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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16편에서 ‘제자훈련’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언급했다. 이번에는 내가 경험한 제자훈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제자훈련이라는 이름으로 교회에서 훈련 프로그램을 인도한 것은 전도사로 사역했던 서울의 영동중앙교회가 처음이었다. 당시 교회에서는 장년들을 위해서도 제자훈련이 있었지만, 청년 대학생들을 대상으로도 같은 제자훈련이 진행되었다. 제자훈련 수료식에는 모든 수료생이 함께 자리했고, 교회 전체의 축복을 받기도 했다. 나는 대학부를 담당하면서 대학생들과 제자훈련을 했다. 제자훈련을 인도하기 위해 CAL 세미나(제자훈련 지도자 세미나)에도 참여했었다.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7편에서 소개한 것처럼, 그때 처음 제자훈련으로 만났던 대학생들은 지금까지도 나의 기쁨이고 영광이다. 그리고 제자훈련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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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초대교회에서 full-time 사역을 시작하고 1년 정도 지나는 시점에, 나보다 먼저 초대교회에서 사역하던 목회자들이 모두 교회를 떠났다. 졸지에 나는 부교역자들 중 선임이 되었다. ‘졸지에’라는 말을 어디에 쓰는지 잘 몰랐는데, 당시 내 입장에 딱 어울리는 말이었다. part-time으로 사역한 기간을 합해도 1년이 약간 넘을 텐데, 교회의 사정도 다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선임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 부담될 수밖에 없었다. 새롭게 부교역자를 EM과 교육부 사역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청빙해야 했다. 문제는 부교역자들이 없는 상황에서 교회 내의 거의 모든 업무를 책임과 지휘까지는 아니더라도(?) 관찰하고 지켜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특별히 담임목사님께서 개인적인 사정으로 새벽기도회를 책임지고 인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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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의 가을은 정말 아름다웠다. 캘리포니아는 Golden State였는데, 뉴저지는 Garden State였다. 그 말대로 나무가 정말 많았다. 물론 미국에 나무가 더 많은 곳도 있겠지만, 7년을 로스앤젤레스에서 살다가 온 내 눈에는 세상이 온통 나무로 가득한 것처럼 보였다. 가을이 되니 단풍이 시작되었다. 미국에 오기 전에 가족과 설악산 단풍 구경을 하러 갔었는데, 뉴저지에서는 따로 단풍 구경을 다닐 필요가 없었다. 모든 길이 단풍의 예쁜 색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가을이 깊어지자 낙엽이 쌓인다. 자꾸자꾸 쌓인다. 어마어마하다. 길의 코너에 모아놓은 낙엽은 옆에서 차가 오는지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그렇게 가을이 지나가나 싶더니 눈이 내린다. 눈이 어마어마하게 내린다. 미국 살면서 7년 만에 처음으로 ..
LA에서 뉴저지로 이주를 결정하고 이삿짐을 꾸릴 때, 미국 생활 6년 반 만에 우리 가족의 짐은 2배가 되었다. 이삿짐센터를 알아보니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견적을 내러 오는 사람들이 차라리 한국으로 가는 것이 비용이 덜 든다고, 대륙횡단은 돈이 많이 든다고 했다. 타던 차 중 하나를 팔아서 이사 비용을 마련했다. 그리고 나는 혼자서 차를 타고 대륙횡단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주변의 만류가 심했다. 혼자서는 위험하다고. 겁이 많은 나는 대륙횡단을 포기하고, 차도 보냈다. 지금까지 인생에서 별로 후회하는 일이 없는데, 대륙횡단 포기는 아직도 이불킥의 원인이다. 뉴저지에서 아이오와까지 몇 차례 왕복했고, 아이오와에서 캐나다를 거쳐서 옐로우스톤을 다녀오는 로드트립을 했기에, 대륙횡단 거리보다 훨씬 많은 운전을..
나는 살면서 처음 불면증을 겪었다. LA에서 교회 사역을 정리하고 어떤 계획도 세우지 못한 채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이, 잠을 못 이루게 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오늘은 뭐 하지? 내일은 뭐 하지? 늘 그런 생각을 했고, 과연 내가 목회를 계속할 수 있을까? 어떤 교회에서 나를 청빙할까? 복잡한 생각이 계속 반복되었다. 그래서인지 매일 잠을 잘 수 없었다. 한 시간 정도 자면 잠이 깨고, 다시 잠이 들어도 삼십 분, 한 시간을 넘겨 잘 수 없었다. 마음을 잡으려고 말씀 묵상에 힘을 더 기울였다. 매일 묵상 글을 쓰기는 했지만, 조금 더 깊이를 가지고 쓰려고 노력했다. 사실 6년 넘게 최선을 다해 사역에 임했기 때문에 쉼을 갖는 것은 필요했던 일이었다. 나는 “주님, 딱 넉 달만 아무 일도 안 ..
교회에 엄청난 돌풍이 불어왔다. LA에서의 이야기다. 교회는 싸움에 휘말렸다. 자세한 이야기를 모두 말하기에는 지면도 시간도 부족하다. 사실 모두 썼다가 지우고 나와 관계되는 일만 쓰고 있다. 말도 되지 않는 의혹으로 담임목사님께 반대하는 세력들은 계속 교회를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 싸움이 지속되었다. 한참 힘든 시기였는데, 담임목사님은 약속된 한국 집회를 가셨다. 그리고 목사님이 계시지 않는 주일에, 나는 2부 예배 설교를 하게 되었다. 당시 가장 많은 교인들이 모이는 예배였다. 교회를 어렵게 하는 반대 쪽 사람들은 늘 예배당 앞쪽에 앉아서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다. 설교 후 헌금 시간에 갑자기 예배당 한쪽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원로목사님이 강단으로 올라오시려고 하셨고, 교인들이 막았다. ..